[책 속 명문장] “광대하고 게으르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나도 늦게 꽃필 수 있을까?
[책 속 명문장] “광대하고 게으르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나도 늦게 꽃필 수 있을까?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06.2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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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나는 늦게 꽃핀 예술과 학문 대가들에 엄청 관심이 많다. 나도 혹시 늦게 꽃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색하고 애잔한 소망 때문이다. 서른이 가까워오자 서른 이후에 꽃핀 사람들을, 마흔이 가까워오자 마흔 이후에 꽃핀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왔다. 아마 이 탐색은 쉰 넘어 꽃핀 사람들, 예순 넘어 꽃핀 사람들, 일흔, 여든, 아흔......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 

그동안 찾은 사람들로 몇 년 전 대유행한 ‘백세인생’ 노래를 새로 쓸 수도 있겠다. 
“육십 세에 아직도 이룬 게 없느냐 묻거든 프랭크 매코트(『안젤라의 재』로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가)는 66세에 데뷔작 썼다 일러라~ 칠십 세에 아직도 이룬 게 없느냐 묻거든 모지스 할머니는 78세에 그림 시작했다고 일러라~”
물론 이런 거 찾을 시간에 글이라도 한 줄 더 읽고 한 줄 더 썼으면 죽기 전에 꽃필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꽃핀다”의 의미는 유명해지는 것보다도 자기 분야에서 스스로 인정할 만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경지의 뭔가를 이뤄서 극소수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생각을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에 세속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3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후의 3년 동안 눈부시게 ‘꽃핀’ 셈이다. 그런데 그도 당대 화가들에 비해서 늦게 그림을 시작했기 때문에 늦게 꽃핀 편이었다. 

늦게 꽃핀 대가들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경제형편 같은 외부 상황 때문에, 또는 자기 재능을 몰라서 늦게야 그 분야에 뛰어든 사람들. 그리고 일찍부터 그 분야에 있었지만 대기만성형으로 천천히 성장한 사람들. (중략)

소설가 박완서는 전업주부였다가 서른아홉살(만 나이. 외국 작가들은 만 나이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한국 작가도 만 나이로 해야 형평성이 맞지!)에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나목』으로 등단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억압됐던 시대에 재능을 억누르고 가정주부로 살다가 자식들이 장성한 후 늦게 꿈을 펼친 경우가 국내외 막론하고 많이 있더라. ‘페미니즘 미술 대모’로 불리며 최근 세계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고 있는 팔순 미술가 윤석남도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마흔 언저리에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저 살기 위해서” 붓을 들었다고 한다. (중략) 

그러나 늦게 꽃핀 대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마냥 희망적이지 않은 건, 이들 중 나처럼 게으른 인간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세잔은 유명한 전설대로 사과를 100번 넘게 다시 앉아서 그렸다. 그리고 프랭크 매코트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여기서 “뭔가 일어날 거다”는 따뜻한 격려지만, “계속 끄적거려라!”는 참 서늘하고 무서운 충고다. 심지어 느낌표도 “뭔가 일어날 거다”가 아니라 “계속 끄적거려라!”에 붙어있잖아! 아아......, 방황할망정, 느릿느릿 갈망정, 그냥 늘어져 있어서는 안 되는구나. 뭔가를 끈질기게 하며 게을러야지, 무기력하게 게으른 건 안 되는구나, 죽기 전에 한번 꽃펴 보려면. 

『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민음사 펴냄│284쪽│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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