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지금 딸의 나이, 그러니까 정확히 열 살 때 나는 리스본에서 1년간 살았다. 돌이켜 보면 리스본에서 보낸 그 1년만큼 아무런 유보 없이 평온하고 행복했던 적이 내 인생에 있었을까? (중략) 지난 늦여름, 아빠를 엄마 곁으로 보내드리고 나는 상실의 슬픔과 사후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마음이 깊이 지쳐갔다. 때로는 인간에 대한 절망과 환멸의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즈음이었다. 내 곁의 딸을 보면서 아, 내가 지금 이 아이 나이였을 때 그곳에 있었지, 깨닫고 미소 짓게 된 것은. 그렇게 기억속에 묻어뒀던 리스본의 존재가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갔다 <11쪽>
한국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는 아직 없다. 에어 프랑스 항공사를 이용,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경유해서 리스본으로 가는 중이다. 승무원이 나눠준 종이 메뉴판에 쓰여진 문구가 퍽 인상적이다. '당신이 원하는 메뉴가 다 떨어졌다고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인기 많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 여지없는 프랑스다움에 피식 웃음이 새 나온다. <15쪽>
리스본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하는 곳이 코메르시우 광장이라고 한다. 탁 트인 광장 너머로 웅장하게 펼쳐진 테주강에게 '지금 여기, 내가 리스본에 왔다'라고 신고하고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며. 그 말이 꽤 설득력이 있어, 윤서와 나는 호텔을 나와 강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십여분을 걷는다. 리스본이 끼고 있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는 것을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리스본 도심에서 약 이삼심 분 거리에 있는 텔렝탑부터가 테주강의 끝이자 대서양의 시작이다. <31쪽>
보사노바에서 특히 그렇지만 포르투갈어로 쓰인 노래 가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우다지'(saudade)가 아닐까 싶다. 사우다지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서인데 한 나라 고유의 특성이 대개 다른 나라 언어로 명료하게 번역되기 힘들 듯이, 사우다지도 딱 떨어지게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리움, 향수, 애수, 추억, 갈망 이 모든 것을 합한 그 무엇.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 느끼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그리움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는, 계속 곱씹게 되는 감미로운 사랑의 감정과 그 안에서 우러나는 달콤한 슬픔. 상실의 고통은 힘겹겠지만 사우다지와 함께라면 먹먹해진 마음은 부드럽게 어루만져질 것이다. <200쪽>
『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펴냄│272쪽│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