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생 악보를 연주하다
다시 인생 악보를 연주하다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04.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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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마을 둘레 길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길 옆 밭고랑에 뿌리가 뽑혀 반쯤 몸을 뉘인 마치 회초리 같은 나무가 연둣빛 새순을 틔워 노란 개나리꽃을 활짝 피웠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로 이 나무가 이 처지에 놓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작년 가을 수확 시 이곳 밭주인은 작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잡초라 여기어 뽑았나보다. 그럼에도 강인한 생명력의 나무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 주위에 몇 가닥 남지 않은 잔뿌리가 바싹 말라 있다. 이로 보아 그 중 실한 뿌리가 악착같이 땅의 지표(地表)를 뚫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봄을 기다려 온 듯하다. 

이것을 보자 고(故) 황태영 작가의 「봄을 기다리는 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라는 제호의 글이 문득 떠올랐다. 고 황태영 수필가는 이 제목의 글에서 기다림의 절박함과 그것이 지닌 힘에 대하여 이렇듯 표현 했다. 의학적으로 2~3시간도 넘기기 어려운 중환자도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기 위하여 3-4일을 버텼다고 말이다.

이 개나리도 봄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생장 조건을 극복하고 이렇듯 어렵사리 꽃까지 피웠나보다. 이 것을 대하자 ‘삶을 살며 가장 절박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가 언제였을까’ 돌이켜보니 나의 경우 건강을 잃었을 때다.

갱년기가 시작 될 즈음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는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수 년 전, 담낭에 생긴 선 근종이라는 혹으로 담낭 제거 수술과 간 일부 절제술이란 수술을 받을 때 일이다. 병원 수술실 앞에서 난생 처음 하나님을 찾았다. 수술을 받기 위하여 휠체어를 타고 병원 수술실의 긴 복도를 지날 때는 만감이 교차하기까지 하였다. 

곧이어 냉기 도는 수술대 위에 몸을 눕힌 후 벗어놓은 신발을 새삼스레 바라보며, “ 저 신발을 과연 나는 다시 신을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알 수 없는 회한에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흐르기도 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병마 앞엔 누구나 쉽사리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그때의 간절한 바람은 모쪼록 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대하는 일 뿐이었다.

이 수술만 끝나면 나는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평소 작성한 버킷 리스트 목록을 점검하며 제2의 삶을 알차게 살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 후 그토록 기다렸던 건강이 회복 되자 수술 실 앞에서 지녔던 절박했던 심정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느 사이 온갖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나를 차츰 엄습해 왔다. 지난날 병원 수술실 앞에서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건강 회복의 고마움 따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석 되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를 돌아볼 때 인간은 얼마나 탐욕으로 점철 됐는가. 그토록 삶 속에서 갈망 했던 건강쯤은 이젠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떻게 하면 많은 부(富)를 쌓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어찌하면 좋은 글을 써서 좀 더 독자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설까.’ 이런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역시 인간은 망각을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듯하다.

또한, 헛된 욕심은 만병의 근원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맞는 성 싶다. 그동안 덮쳐온 병마도 모자랐었는지 얼마 전엔 허리까지 병이 발병하여 몇 달을 교정 복을 입고 외출도 자제하고 지내야 했다. 이때 비로소 나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시간을 모처럼 가져봤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건강이었음을 뼈 속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와 명예, 그것이 아무리 귀하다한들 건강만큼 소중하랴. 허리엔 딱딱한 교정 복을 입고 통증 때문에 보행을 제대로 못하고 몇 달을 지내노라니 우울증까지 겹쳐 밤엔 불면으로 고생하기 일쑤였다. 이런 형국이니 만사가 귀찮고 시들했다. 차츰 의욕도 활기도 잃을 즈음, 친구가 전해준 한마디 말이 나를 어둡고 음습한 우울의 터널에서 쉽사리 빠져나오게 했다.

“ 네가 그토록 쓰고자 했던 소설을 이제라도 써보렴, 너는 분명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 거야. 네 곁엔 문학이 있단다.” 친구의 이 한마디가 바닥으로 마냥 주저앉은 나를 꿋꿋하게 일으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말은 그동안 잦은 병치레로 물든 가슴의 잿빛 얼룩을 말끔히 헹궈 주고도 남음 있었다. 친구의 따뜻한 격려가 재생의 활력을 안겨준 셈이다. 

친구의 말에 힘입어 희망찬 봄을 맞아 다시 인생 악보를 준비해야 할까보다. 새로 쓰는 나의 인생 악보엔 건강, 희망, 사랑의 음표를 크고 선명하게 그려 넣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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