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마음의 물감
찬란한 마음의 물감
  • 관리자
  • 승인 2006.04.29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혜식 (수필가)

 

 욕구가 작아질수록 인간은 천진해지나보다. 노인의 표정 속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백의 마음이 언뜻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나도 늙으면 지금의 저 할머니처럼 거울을 바라보며 저토록 즐거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놓쳐버린 지난 청춘이 안타까워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 섞인 푸념만 쓸데없이 늘어놓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제도 아파트 앞 공원을 산택하며 할머니를 뵈었었다. 굽은 허리, 듬성듬성 숱이 적은 백발 아래 드러난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은 젊은 날 온갖 풍상을 다 겪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할머니의 외양을 관심 있게 살펴 본 것은 여느 노인에 비해 행동이 다소 기이해서이다. 지팡이에 노구를 의지한 채 공원을 힘겹게 걷던 할머니는 갑자기 공원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돌발적인 행동이 망측했으나 연세 많은 노인분이 볼일이 급하여 그러려니 하고 처음엔 못 본체 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그 장소를 오게 된 나는 아예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아연실색을 했다. 마침 공원에 인적은 뜸했지만 벌건 대낮에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반라의 할머니의 모습은 바라보는 내 쪽이 왠지 민망할 정도였다. 혹여 남정네들이라도 그곳을 지나치다가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볼까봐 가슴이 조마조마 하기 까지 했었다. 초겨울의 날씨는 다행히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바람은 몹시 차서 행여 할머니께서 추위 때문에 병환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나는 생각다 못해 얼른 할머니 곁으로 달려가 할머니께 마을 붙였다.

 “할머니 댁이 어디세요? 추우신데 바지를 입으세요.”
라며 바지 입기를 권유하자 할머니는 초점 읽은 눈동자로 먼 곳만 응시할 뿐 내말은 못들은 척 하였다. 나는 혹시 청각에 이상이 있나 싶어서 귀 가까이 대고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역시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벗어놓은 바지를 찾아 억지로 입히려 하자 할머니는 바지를 입지 않으려고 온 몸을 버둥대며 안간힘을 썼다. 나중에는 나의 손을 힘껏 뿌리치더니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난데없이,

 “중공군이 쳐들어온다. 도망가자.”
라며 고함을 벽력같이 질러댔다. 나는 갑작스런 할머니의 행동에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 때 중년의 한 여인이 할머니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저만치 보였다. 그녀는 단숨에 할머니가 있는 장소로 달려와서는 할머니의 벌거벗은 아랫도리를 황망히 바라보며 내 앞에서 몹시 난감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런 할머니의 행동을 대신 변명이라도 하듯이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할머니에 관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시어머님이 올해 연세가 일흔 아홉이라 한다. 작년부터 갑작스레 치매가 걸려서 가끔 이상한 언행을 저질러서 가족들이 많은 곤욕을 치루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밖으로 거둥할 때는 늘 자신과 함께 나왔는데 오늘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집에서 혼자 슬그머니 나와서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겼다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느 사이 틈을 타서 할머니는 반라의 몸으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펄쩍펄쩍 공원길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그런 할머니의 행동에 기겁을 하였다. 할머니를 가까스로 붙잡고 진정시켜서 간신히 바지를 입혔다.
 나는 어제의 그 일들도 있고 해서 오늘도 점심때 쯤 할머니께서 공원에 또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내가 공원 한 바퀴를 다 돌 즈음 지팡이를 짚고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공원으로 향해 걸어오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공원에 당도한 두 사람은 볕이 잘 드는 쪽을 택하더니 의자에 앉아 며느리는 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빗이랑 염색약이었다. 그녀가 그릇에 염색약을 혼합 하는 동안 의자에 앉은 할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표정 그대로였다.

 드디어 그녀가 머리를 매만져주자 할머니는 연신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입속으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할머니의 머리염색을 손수 해 드리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치매 증세를 심하게 보이다가도 당신의 흰머리에 염색을 해드리는 날만큼은 몹시 즐거워한다고 했다. 시어머님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자신도 마음이 흐뭇하여 시어머님의 머리에 직접 염색을 해드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할머니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그녀가 머리 염색을 하는 동안만큼은 치매 증세도 잠시 사리진 듯한 평온한 안색이 분명했다. 그것으로 보아 여자는 아무리 늙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녀는 자신의 시어머님의 지난 삶을 내게 잠시 들려주겠노라고 나를 붙잡았다. 할머니는 젊어서 결혼 한지 두 달 만에 6.25가 터져 신혼의 단꿈도 젖어보지 못하고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게 되었다한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온갖 행상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할머니의 높은 교육열과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자신의 남편은 최고 학부까지 나와 현재 미국 모 대학 교환 교수로 재직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할머니를 모시고 두 달 전 고국에 와 딸집에 잠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듣고 할머니의 지난 삶을 비추어보면 할머니는 어쩜 머리 염색만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살아온 고통의 세월을 다시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애환과 한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고 옹이진 손으로 삶의 갈피를 들추어 마음의 물감으로 그것을 찬란하게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당시엔 팍팍하게만 느껴졌던 질곡의 세월도 지나고 보면 생의 페이지를 수놓는 한편의 추억이었음을 그분인들 왜 모르랴. 아마도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이유는 노환에 의해서 나타나는 증세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날 전쟁터에 남편을 빼앗기고 홀로 험한 세상을 살아온 깊은 한이 어쩜 은연중에 할머니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치매라는 병이 똬리를 튼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자신의 백발을 염색할 때마다 생의 빛바랜 사진첩에 깊이 묻어둔 잃어버린 청춘을 그 순간만큼이라도 되찾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저리도 기뻐하는 것은 아닐 런지.
 치매는 노년에 찾아오는 병이니만큼 노년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병이다. 문제는 정작 병든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노년에는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 될 것 같아 지금부터 나도 걱정이 앞선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 치매 걸린 부모까지 봉양하게 한다면 얼마나 자식들한테 큰 짐을 지우는 것일까. 나라고 그 병이 비켜갈 리는 만무이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미래의 노후를 떠올리자 남의 일 같지 않아 까닭 없이 마음이 우울했다.
반면 나는 그 할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나의 노후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멋지게 보낼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노년의 삶을 미리 준비해 보는 유비무환의 지혜까지 얻게 되었다.                                         

독서신문 1395호 [2006.01.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