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쫄보라도 괜찮아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쫄보라도 괜찮아
  • 스미레
  • 승인 2019.02.1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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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해 보일까 봐 소심하다는 말도 못 하지만, 나는 소심하다. 망설이느라 필요한 말 못 하고, 하고 싶은 일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 경험도 무수히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당황하고 후회한다. 검색하고 결정하는 데 한 세월이 걸린다. 아이 엄마는 단단해야 한다는데, 나를 뺀 인구 모두가 씩씩한 것 같은데, 8년 차 엄마인 나는 여전히 소심하다.

더 적나라한 표현으로는 ‘쫄보’가 있겠다. 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남을 배려하는 수준이 가히 지구 최상위급인 사람. 좋게 말해 조심스러움, 더 좋게 말하면 사려 깊음.

쫄보들은 대개 민감하다. 남들에겐 별 것 아닌 일도 그들에겐 핵폭탄급 위력을 행사한다. 내 경우엔 ‘무서운 수학 선생님’에 관한 기억이 그렇다. 오래된 기억이건만 그 영향력이 어찌나 완강한지, 아이 수학을 대할 때조차 남몰래 조마조마하다.

연산 문제를 내달라는 아이에게 늘 쉬운 문제만 낸다. 아이가 “엄마, 이제 어려운 것 좀 내주세요.” 해도 섣불리 수준을 높이지 못한다. 틀려도 모른 척 넘어가기도 한다. 조금만 더 풀면 좋겠는데, 아이가 지루해하는 신호를 보내면 더 하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방문 학습지는 아이가 싫어하여 두 달 만에 그만뒀다. 수학에 관해서는 그 어떤 사소한 것도 과감히 밀어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만해도 된다는 솔직하지 못한 말이 툭 나온다. 수학과 마주한 내 안의 내면 아이가 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와 달리 남편은 종종 어려운 문제를 내서 아이의 도전 욕구를 건드린다. 수학 잘하는 남편에게는 이런 문제 풀이가 게임이고 유희인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뾰족해진다. 아이의 마음이 상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달려들어 문제를 풀고, 맞히면 춤을 추며 기뻐한다. 그러나 숫자의 세계는 냉정한 곳. 틀리는 즉시 남편은 “땡!!”, 요란한 효과음까지 내며 틀림을 지적한다. 숨죽인 나와 달리 아이는 자기가 오답을 낸 이유를 말하며 깔깔 웃는다. “다시 해 볼래요!” 호기롭게 도전한다.

수학 잘하는 또래 아이가 있다. 이 아이 엄마는 ‘아이 수준에 맞으면 그게 적기 교육’이라며 적극적인 선행을 시킨다. 계획을 세워 여러 문제집을 풀리고 수 개의 과외도 시킨다. 그 모습이 마치 높은 목표를 책정해주고 진두지휘하는 장군 같아 보였다. 남몰래 부러웠다. 우리 아이도 수학에 소질을 보이기에 나도 그러고 싶었다.

나에겐 왜 저런 힘과 투지가 없는지 자책했다. 내가 좀 더 용감했더라면. 좀 더 강했더라면. 내 쫄보심(心) 때문에 아이가 더 빨리 나아가지 못한다 생각하니 속이 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몰입』의 저자 황농문 교수님의 인터뷰를 보았다.

“초보자는 풀리는 화두를 연습하는 게 좋아요. 이런 문제를 몇 번 반복해서 풀면 도파민이 분비돼 희열을 느낍니다. (중략) 그때 생기는 자신감은 엄청납니다. 계속 성공하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이긴다는 믿음이 생기고 용감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바뀌는 위너 이펙트도 나타날 겁니다.”

쉬운 문제를 반복적으로 해결함으로 자신감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게다가 그로 인해 용감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니, 내게는 꿈같은 문장이었다.

가만 돌아보니, 아이가 쫄지 않고 수학을 좋아하는 데엔 ‘엄마의 쫄보심’도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심함이 아이를 붙잡고 있다며 끙끙댔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덕에 아이는 성공의 기억을 불려간다. 촘촘해진 유능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어려운 문제에 도전한다. 엄마가 내는 단순한 문제와 아빠가 내는 복잡한 문제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문제 수준의 가파른 높낮이 차에도 아이가 미끄러지지 않은 건, 쉬운 문제를 반복하며 기초를 공고히 한 덕분일 것이다.

쉬운 것을 바탕으로 하는 성장의 경험은 큰 만족감을 준다. 어떤 일을 수월하게 해낼 때, 그 일에 대한 애정은 증폭된다. ‘전능한 자아’가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아이의 경우 특히 그렇다.

소심한 어른도 마찬가지다. 마음 장벽이 낮아진 만큼 의욕은 높아진다.

나는 여전히 아이의 오답을 잘 지적하지 못한다. 뿌듯한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틀렸어.”라는 말은 들어가 버린다. 대신 아이 몰래 작은 별을 그려놓고 언젠가 다시 보기를 유도한다. 세상에는 정답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강남에 살던 시절 그런 생각을 했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집들, 쉼 없이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학원 버스들. 가가호호 아이의 명문대 입학을 향해 달리는 팀을 꾸린 것 같다고. 그것이 틀렸다거나 어떻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겐 그런 팀을 이끌 힘과 열정이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나만 부족한 엄마인 것 같아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의 작은 것에 집중하느라 큰 한방을 내지르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그럼에도 나는 고집스레 내 본능을 따랐다. 남이 아닌, 나의 마음 가는 대로 가보려는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된 지 몇 해가 흘렀다.

아이가 여덟 살이 된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아이에게 높은 목표를 제시하고,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며 용의주도하게 이끌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집 밖 어디서나 어려운 문제와 마주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타인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매 순간 문제를 풀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는 좀 달라도 되지 않을까. 빠르고 냉정한 성과주의 시대에 쉬운 문제만 내주고, 좀 더해보란 말 못 하고, 틀려도 지적하지 않는 방식은 답답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대니까. 빠르고 냉정한 성과주의 시대니까, 응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집에 있는 엄마만큼은, 편안하고 말랑한 존재가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어, 이거 틀렸었네?”

오답이란 마음이 느긋할 때 눈에 띄게 마련. 문제집을 심상히 넘기던 아이가 틀린 문제를 발견하고 재도전했다. 자세도 고쳐보고, 연필도 깎아보고, 짜증도 좀 내는 걸 보니 쉬운 문제는 아닌가 보네. “어려우면 있다 해도 돼.” “아니. 지금 할래요.” 아이의 기세에 나는 그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인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 위로 “다 했다!”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닿았다. 수학이 재미있다며 춤을 추는 아이를 보다 웃어버렸다. 말랑한 엄마 옆에서 아이는 스스로 단단해진다. 도려내고 싶던 내 소심함이 아이의 자율적 의지와 동기를 키우는 데 일조한 것도 같다. 강하고 적극적인 엄마들을 동경했을 뿐, 내가 가진 걸 돌아볼 생각은 왜 못했을까. 본성을 거스르는 건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쓰는 것만큼 어색한 일이다.

그렇기에, 쫄보 만만세.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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