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사십에
여자 나이 사십에
  • 김동민
  • 승인 2006.04.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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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민 소설가     © 독서신문

희순은 후회했다. 여자 나이 사십에 무슨 낭만이 남았다고. 친구 진아가 택시를 불러줄 테니 타고 가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부득부득 황소고집을 부렸다니.
 “너 가다가 비 맞으면 어쩔래? 전신만신이 찌뿌드드하잖니. 날궂이 하나 봐.”
 진아 집 대문을 나설 때 얼핏 올려다본 하늘빛이 심상찮긴 했었다. 그러나 희순은 시골길을 걷고 싶었다. 들국화는 아니어도 구절초도 보고, 누렁텅이 호박이 풀섶에 뒹구는 것도 보고, 흰나비 노랑나비 없더라도 벌떼는 만나고….

 그리고 진아네 k면(面)에서 희순 자신의 집 l시(市)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시간 반이면 족하다는 계산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시내에 들어서리라. 결국 진아가 포기했고 희순은 콧노래를 부르며 들녘을 걸었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흙땅이 그렇게 포근할 수 없고 바람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같이 흔쾌했다. 날씨가 맑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과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희순 눈에 철길이 띄었다. 가슴 한 귀퉁이가 찡했다. 그러고 보니 열차를 타본 지도 십년은 지났지 싶었다. 유난히 열차여행을 좋아하던 처녀 적 시절이 떠올라 슬픔의 덩어리 같은 게 목으로 치밀었다. 저 철길은 l시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희순은 어느 새 철로 위를 밟으며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커먼 침목이 이렇게 정겨워 보일 수 없었고 약간 녹슨 철로마저 눈물 나게 반가웠다. 아, 철길을 밟으며 시골길을 걸어가는 이 낭만, 사치. 세월이 흐른 먼 훗날, 자신은 새로운 추억 하나를 되새기며 살포시 미소 지을 날이 있으리라.
 그런데 희순 마음이 약간 조급해지기 시작한 것은 난데없는 안개가 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심한 안개는 아니지만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잖아도 으슥한 시골인데 꼭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듯한 안개 장막은 누가 뭐래도 환영할 만한 게 아니었다. 진아 말 듣고 택시를 탔더라면 벌써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여자 나이 사십에 무슨 낭만이 남았다고.’
 희순 입에서 또다시 그런 말이 감돌았다. 어쨌든 희순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자치고는 무척 담이 큰 희순이지만 어쩐지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안개가 좀더 짙어지면 길마저 잃어버릴지 몰랐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야 한다. 희순은 거의 뛰다시피 했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한데 얼마나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았을까. 문득 등뒤에서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게 있었다. 희순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런 곳에서 못된 사내와 맞닥뜨려지기라도 한다면. 희순은 애써 진정하기 위해 또 되뇌었다. 여자 나이 사십에….

 그러나 끈끈하게 들러붙는 그 기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이야. 누가 따라온다고…. 희순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릴 적 뒷간에서 볼일 보고 나올 때 뒤가 썰렁해서 더 빨리 걸으면 한층 무섬증이 심해지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래 그때처럼 천천히 걸을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희순은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인데…. 그 순간, 희순이 고개를 돌려 막 지나온 철길 뒤쪽을 돌아본 그 순간이었다. 희순은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세상에, 저, 저게 뭐냐?
 희순은 보았다. 안개 내린 철길 위에 붕 떠 있는 물체 하나를! 희순은 눈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했다. 거기 떠올라 보이는 물체, 그것은 사람의 상반신이 아닌가?
 그랬다. 상반신이었다, 사람의.
 아랫도리가 뎅겅 잘라져나가고 윗몸만 남아 있는 사람, 남자였다. 그것도 머리며 얼굴이며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희순은 숨이 멎는 듯했다. 특히 상반신만 남은 사내의 그 퀭한 눈이라니. 동굴같이 푹 들어간 눈이 희순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저 괴물한테 잡히면 죽는다.’
 희순 머리에 자리잡는 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마음뿐이었다.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발만이 아니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아나야 했다. 하반신 없이 철로 위에 떠 있는 저 귀신에게 잡아먹힐 수는 없지 않으냐. 아니 차라리 잡아먹히는 게 낫지 이렇게 말짱한 정신이 더 못 견딜 판이었다. 희순은 속으로 주문처럼 발악같이 소리쳤다.

 ‘여자 나이 사십에 무엇이 두려울 게 있다고.’
 ‘여자 나이 사십’이 구원이었다. 그런 생각이 비로소 희순 몸을 공포의 사슬에서 풀어주었다. 희순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철길만 따라 가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역에 닿으리라. 승무원이 있고 미화원이 있고 승객이 있는….
 달리고 또 달렸다. 더 이상은 도저히 달릴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빴다. 이제 귀신밥이 되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달리면 심장이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이다.
 마침내 희순은 철로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서 죽어야할 운명이라면 죽어야지. 귀신아, 어서 와서 날 잡아먹어라. 희순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 염병할 망령아. 잡아먹으려면 빨리 잡아먹어. 희순은 마지막 발악하듯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달려온 철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못 따라온 걸까. 아니야. 내가 헛것을 본 거야. 이놈의 안개 때문에.
 희순은 그제야 온몸이 땀으로 멱감고 있음을 깨달았다. 안개는 더해지지도 덜해지지도 않고 있다. 희순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살았다는 기쁨보다 어디서든 드러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은 더욱 강해졌다. 희순은 달리다가 힘이 빠지면 걷고 걷다가 힘이 생기면 달렸다.
 희순 눈에 조그만 가게 하나가 들어온 건 어둠이 제법 짙어갈 무렵이었다. 그 작은 구멍가게가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인은 예순을 훨씬 넘겼음 직한 노파였다. 노파는 희순 표정을 보더니 놀란 눈빛을 지었다. 허리가 분재같이 굽었지만 총기는 밝은 듯했다. 희순은 우선 사이다부터 달래서 마셨다.

 “왜 그리 놀란 얼굴이우?”
 노파가 물었다. 희순은 정신이 이상한 여자처럼 보일까 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하는 말이,
 “혹시 철길 위에서 뭘 보지 않았는감?”
 하는 게 아닌가. 희순은 또 소름이 돋았다.
 “보긴 보, 보았는데 그, 그게….”
 노파가 몸서리를 쳤다.
 “그 망령이 또 나타난 게로구먼.”
 “저, 정말 마, 망령이 이, 있단 마, 말입니까?”
 희순 음성이 높아졌다.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명히 귀신을 본 거유?”
 “그, 그럼요. 아, 아랫도리가 어, 없는….”
 “남자였지우?”
 노파의 주름진 얼굴 가득 어둔 빛이 덮였다.
 “츳, 불쌍한….”
 “불쌍하다고 하셨어요?”
 “그렇다우. 츳, 불쌍하고말고.”
 “무, 무슨 사연이 있는 귀, 귀신이군요?”
 노파는 혼잣말처럼,
 “정말 세상에 귀신이 있는 거구먼.”
 “자세한 말씀을 들려주세요.”
 희순 말에 노파가 물빛 치맛자락을 홱 돌려 바로 앉으며 들려주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저 철길 위에서 동리 남정네 하나가 열차사고로 죽었다우. 술을 마시고 철로를 걷다가 그만…. 한데, 그후로 그 망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유.”
 “설마…?”
 희순 말에 노파가 약간 화난 투로 말했다.
 “지금 눈으로 봤다면서도 그런 소릴 하우?”
 “그, 그건 그렇지만. 그, 그래도 이건….”
 희순은 콜라 한병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비운 유리컵을 낡은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보니, 노파가 오래돼 삐걱대는 가게 유리문을 반쯤 열고 희순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멀거니 내다보고 있었다. 뽀얀 안개에 젖은 듯한 노파의 허연 머리칼이 유난히 희순 눈을 찔렀다.                                                   (끝)

독서신문 1395호 [20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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