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책의 맛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책의 맛
  • 스미레
  • 승인 2019.01.21 13: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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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못할 일은 없다. 국을 끓이고 밥을 뜸 들이는 동안 아이는 식탁에 앉아 조잘대거나 책을 읽는다. 하루 중 가장 집중적으로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아이가 식탁에 앉아 밥 먹는 시간이다. 어르신들께선 못 마땅해 하실 지도 모르지만, 활동적인 아이에게 책을 읽히기에 식탁만큼 좋은 곳이 없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대화가 꿰어지니 식탁이 가족 대화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음식을 먹으며 책 읽기를 좋아한다. 먹는 걸 좋아해서인지, 책에 음식이 나오면 몰입이 유독 잘 된다. 예를 들면 '더블리너스'의 두 주인공이 진저 비어를 마시는 장면을 읽으면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취기가 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 생선 살의 쫄깃함이나 라임즙의 톡 쏘는 향이 입안에 감돈다. 참고로 나는 술을 못 마시고 익히지 않은 생선은 입에도 못 댄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무언가를 먹으며 책을 보는 건 내가 아는 최고의 도락이었다.

빨강 머리 앤을 읽을 때면 주스를 챙겼다. 앤과 다이애나의 황당한 라즈베리 코디얼 사건1)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통닭(치킨이 아닌)을 먹을 때면 사냥꾼이 눈밭에서 꿩고기를 구워 먹는 전래동화를 읽었다. 통닭을 눈밭에서 먹는 꿩고기라 상상하며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졌고, 책은 더 흥미진진해졌다. 어디선가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는 날이면 슈퍼에서 초콜릿을 종류 별로 한 움큼 집어오곤 했다. 달콤 쌉쌀한 초콜릿을 입에 넣고 책을 펼치는 순간 무수한 경계가 사라졌다. 침대에 앉아 찰리가 사는 잿빛 런던으로 떠나는 것, 나는 그것을 황홀함이라 어림했다. 4D 영화도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흡입력 있지는 않으리라.

맛은 실로 강력한 감각이다. ​혀로 느끼지만, 기억으로 저장되며 시공을 초월한 감각과 심상을 불러온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머금자 어린 시절이 눈앞에 되살아났다는 프루스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도 이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시작은 '사과가 쿵!'이었다. 돌쟁이 아이에게 사과를 긁어 먹이며 사과가 쿵!을 읽어주었다. 만약 아이가 그 날을 기억한다면, 사과가 쿵! 표지만 보아도 삭삭 사과 긁는 소리와 티스푼 위로 뽀얗게 고이던 즙,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던 새콤한 맛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사과를 먹을 때는 사과가 쿵을, 수박을 먹을 때는 '수박밭에서'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자라며 자연히 책 목록과 매치 되는 메뉴와 활동이 늘어갔다. ​

심심한 날이면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처럼 폭신한 빵을 만들어 먹었고 케이크를 먹는 날엔 '신기한 스쿨버스: 케이크에 갇히다'를 펼쳤다. 각종 야채를 털어 넣고 미스트로네를 끓이는 날은 ‘돌멩이 수프가 최고야!’를 보는 날이다.​ 

아이는 피자를 먹을 때면 '셈 아저씨의 피자가게를', 김밥을 먹을 때면 '할아버지와 놀이공원에서'를 꺼내온다. 혹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여 상에 올라온 음식과 어울리는 책을 찾아오기도 한다. 재미있으니 그리 한단다. '자발성'이나 '자기 주도성'이 별거인가 싶다.

'책 놀이'란 마음먹고 하는 거창한 독후 활동이나 시끌벅적한 몸 놀이로만 국한될 게 아니다. 애매하고 소소해도 즐거우면 좋은 놀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강력한 장기 기억을 만드는 재료가 바로 이 ‘즐거운 감정’이라고 말한다. 우리 뇌의 감정을 주관하는 부위인 편도체와 기억 중추인 해마는 붙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편도체가 즐거움으로 활성화되면 해마도 덩달아 함께 활성화되는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이 동반된 기억이 더 오래 남을 수밖에.

아이와 나는 맛이라는 즐거운 감각과 감정, 책 속 이야기를 오가며 기억을 엮는다. 밥 한 숟갈에 이야기 한 줄. 맛도 이야기도 더 풍부하게 음미하며 느리게 씹고 천천히 삼킨다. 우물우물, 책을 읽는 내내 발음이 뭉개지기 일쑤지만 덕분에 아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만 먹은 날은 없는 것 같다. 단둘이 마주한 소박한 이첩 반상도 왁자지껄 풍요하다. 온갖 감각이 반짝이고 입안과 마음이 경쾌하다.

아이는 위의 책들을 '맛있는 책'이라 부른다. 정말 책에도 맛이 있다면. 그 맛은 ‘즐거운 맛’일 테다.

※ 앤과 다이애나의 황당한 라즈베리 코디얼 사건1) 
다이애나는 큰 컵을 한 잔을 따르고는 그 옅은 빨강 색조를 감탄하듯이 바라보더니 조금씩 홀짝 거렸다. “정말 맛있는 라즈베리 코디얼이네, 앤.” 그녀가 말했다. “라즈베리 코디얼이 이렇게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좋아하니 다행이네. 실컷 마셔. 나는 달려나가 불을 좀 지피고 올 테니. 너도 알다시피 집안일을 하다 보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좀 많니?” 앤이 부엌에 갔다가 왔을 때 다이애나는 코디얼을 두잔 째 마시고 있었고, 앤이 권하자 세 번째 잔도 거리낌 없이 마셔버렸다. 텀블러 잔의 양은 넉넉했고, 라즈베리 코디얼은 확실히 아주 맛있었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중에서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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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례 2019-02-02 11:01:16
책을 읽는 기쁨과 즐거움을 깨우쳐주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