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각종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일제시대 항일과 친일의 역사가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일제시대 의병활동을 극적으로 다루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드라마를 통해 어렴풋이 접했던 역사의 일면이 실제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이 책은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1906년 5월 8일 신돌석(29세)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해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영덕)에서 의병(영릉의진)을 일으켰다. 양반 의병장들이 서원과 향교에서 거병한 반면 그는 마을 주막 앞에서 구국의 깃발을 올렸다. 이때 200~300명 가량의 의병이 모였다. 신돌석 부대는 영양, 영해, 울진 등의 관아를 습격해 총과 화약을 확보했고, 퇴계 가문 등 양반들로부터 1,656냥의 자금과 쌀, 짚신 등을 지원받아 전열을 갖췄다. 일제는 '신돌석 생포 작전'을 벌이며 강하게 압박했기에 신돌석은 만주로 떠나려했으나 영덕군 북면 눌곡에서 김상렬 형제에 의해 살해됐다. 김상렬 형제는 현상금에 눈이 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07년 6월 15일부터 넉 달 동안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조선 침탈을 폭로하고자 고종이 파견한 특사 세 사람(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로 향했다. 하지만 조선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준은 화병으로 7월 14일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격노했고 총리 대신 이완용을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고종에게는 일본의 선전포고를 운운하며 협박을 자행했고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퇴위를 건의했다. 고종은 진노했지만 대응할 힘이 없었다.
1907년 7월 20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분노한 민중은 일진회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국민신보사를 습격했고 조선 병사 수십 명이 일본경찰서를 습격해 순사 세 명을 사살했다. 이에 일제는 8월 1일 맨손 체조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위대(국왕 호위대) 병력을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해산을 명령했다.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을 비롯한 부하 몇 사람이 권총 자살로 반발했고 시위대 장병 1,000여 명은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 42명을 사살했다. 9월 3일에는 지방 군대마저 해산되면서 조선 왕조의 군대 8,000여 명이 모두 사라졌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거사 이틀 전, 안중근과 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역장인 러시아인에게 "가족 마중을 왔다"며 기차가 오가는 시간을 물었고 역장은 친절하게도 "모레 일본 이토 공이 아침 6시 이곳을 지나 9시쯤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이토가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기다렸고 결국 이토는 안중근의 손에 사살됐다.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큐멘터리 일제시대』
이태영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412쪽|2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