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를 한 손에 쥐고 호령하던 폼페이우스가 루비콘강을 건너온 카이사르에게 쫓긴다.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는 한때 친구였으나 지금은 피해야 할 적.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폼페이우스에게 이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
제국의 황제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것이 된 아드리아해 너머를 바라보는 나폴레옹.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황제는 결국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한 채 대서양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기상을 접는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역사들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에 면한 아름다운 도시 두브로브니크에서 환상적으로 합쳐진다. 이곳은 소련 붕괴 후 다양한 민족·종교적 갈등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상흔을 안은 도시. 사연 있는 두 연인의 로맨스와 함께 도시는 그 부활을 알린다. 마치 나폴레옹이 과거 정복의 기념물로 도시에 세운 십자가가 내전으로 파괴되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새롭게 복원된 것처럼.
한때 천정배, 정동영과 ‘천·신·정 3인방’으로 이름을 날리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4선 정치인 신기남. 늘 활짝 피어있을 것만 같던 그의 20년 정치 인생도 어김없이 종점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신기남이라는 이름이 잊힐 즈음. 신기남은 소설 한 권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각오로 필명은 ‘신영’.
크로아티아, 그곳 아드리아해에 면한 아름다운 도시 두브로브니크. 이곳은 2016년 정계에서 밀려난 신기남이 파도에 등 떠밀리듯 가게 된 도시다. 과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신기남은 ‘신영’이 됐을까. 그가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났다는 누군가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거의 신기남과 현재의 ‘신영’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 도서관의 정책을 관장하는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의 수장도 맡고 있는 신기남 위원장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 국립중앙도서관 7층을 찾았다.
-<독서신문>의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되셨다.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5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품격 언론과 인터뷰하게 돼서 무척 기쁘고 영광스럽다. 독서신문은 변호사로 왕성하게 활동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한 30년 됐다.
여러 언론에 기사가 나고 인터뷰도 했지만, 오늘 인터뷰가 가장 큰 기쁨이다. 작가로서, 현재 나서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최우선의 언론이기 때문이다. 13년 전 한글날을 국가기념일로 만드는 등 한글 발전 공로로 ‘외솔상’을 받았을 때만큼 기쁘다.
-신기남이 아닌 ‘신영’으로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
내 나이가 6학년이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뒤늦게 소설가로 데뷔하는 만큼, 소설가로는 서른 살 쯤 됐다고 생각한다. 인생 새 출발. 젊게 보이고 싶기도 하고, 스스로도 젊음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었다. ‘신영’, 새로울 신(新)에 젊을 영(young)이다.
본래 경력이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신영’이라는 필명으로만 활동하려고 했다. 새로운 이름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고 싶고, 새롭게 인식되고 싶었다. 그러나 출판사 측에서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며 ‘필명을 쓸 때 쓰더라도, 본명도 밝히고, 경력도 밝혀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본명을 드러내게 됐다.
-소설을 반쯤 읽었다. 기자도 한때 소설가를 꿈꿔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첫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중견작가의 소설 같다.
그야말로 과한 칭찬이다. 첫 작품이라면 예상하는 선입관에 비교해 볼 때 괜찮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할 테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다. 대학교 때는 단편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다들 내가 국문과를 갈 줄 알았는데, 어머니 희망을 좇아서 법대를 가게 됐다. 글을 계속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 졸업하고 제대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법조계 및 정치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지 못했다. 법조계나 정계에 있을 때 항상 ‘다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글을 써야지, 써야지’ 했다. 다행히 지금에서야 모든 것을 그만두고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돼 여기에 몰입하게 됐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소설을 두 편 썼다. 이달 출간된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이 두 번째 작품인데, 먼저 출간됐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마치 큰 건축물을 짓는 것처럼 치밀한 구성이 필요했고, 아무래도 오랜만에 펜을 잡으려다 보니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대한 과감하고 독특하게 쓰자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 알게 된 것을 판타지 색채가 깃든 스토리 속에 다듬어 넣었다. 정치세계를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세계 각 곳을 두루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만큼이나마 쓰지 못했을 것이다.
소재, 무대, 구도, 스토리… 표현 방식에서 나만의 개성을 발휘하고자 노력했다. 평범함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데 대해서 만족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도감을 느낀다.
-판타지와 로맨스라는 장르에 세계사적 지식의 결합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나이에 선택한 장르라고는 믿기 어려운데…
‘신영’이라는 필명에서도 영원한 젊음을 지향한다는 마음이 읽히지 않는가? 육체도 정신도 결코 노쇠하지 않고 항상 새것을 호흡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면서 살려 한다. 굳이 비결을 꼽자면, 나는 소년시절부터 양면을 겸비하려고 애써온 편이다. 정신은 역시 꾸준한 독서를 통해서 가능하다. 몇 권 읽을지에 대해 집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권은 읽으려고 한다. 육체는 격렬한 운동을 통해 조련할 수 있다. 운동은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수련했다. 유도관 밖에 없던 국회에 태권도장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혼자서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는데, 소설을 읽으며 ‘부활’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 신기남이 소설가 ‘신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 것인가.
내 소설에서 부활이라는 개념을 잡아낸 기지가 놀랍다.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적 권력이라는 것은 일시적이다.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착시현상일 뿐. 곧 무형의 물체가 돼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문화만이 남는다. 역사는 정치 기록이 아니라 문화의 집적물이라고 본다. 즉, 진정한 역사는 문화다.
두브로브니크의 상징은 바닷가에 우뚝 서 있는 성이다. 성안에 군림한 것은 흘러간 권력자들이 아니라 성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문화인 것이다.
나폴레옹이 스르지 산정에 거대한 십자가를 세운 것은 정복의 표시로 한 것이었지만, 190년 후에 전쟁으로 파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 새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물로 변모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 때문에 전쟁은 일어나지만, 결국 인간의 또 다른 본성 때문에 평화가 찾아든다. 그것을 인간의 부활이라고 칭해도 좋을 것이다.
20년이라는 과도한 기간 정계에 머물렀던 신기남이 소년시절의 자기로 돌아가서 소설가 ‘신영’으로 태어난 것도 부활이라면 부활이랄 수 있겠다.
-지난 7일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정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소설가 ‘신영’이 정치인 신기남의 인생을 회고한다면,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을 전망한다면…
과분한 대우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해왔다. 우연이자 행운이었다. 많은 경험을 했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도 했던 것 같다. 좋은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해서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오래 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개혁정당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제1당을 만든 다음 더하지 말고 진작 이쪽으로 선회할 걸 그랬다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살짝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것이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문학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보려 한다. 우선 이번에 출간된 소설이 조금은 팔려야 그것이 가능할 텐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독자들의 평가에 내 인생이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4선 국회의원이자 한 당의 대표셨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으며, 문재인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으신 중견 정치인인데… 지금의 정부나 정계에 소설가 ‘신영’으로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면…
다 잘하고 계시는데 내가 새삼 뭐라 평가하기가 주저된다. 다만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런 본질적인 말을 해주고 싶다. 진보정치란 소수자, 약자의 편에 서주는 정치다. 그래야 균형이 잡히고 사회가 평온해진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정의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전략인 것이다. 그 진보의 길을 가려면 남다른 양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일렬로 다수의 편에 줄 서서 기회를 엿보는 식의 회사원 정치 말고, 자기의 사상과 개성을 맘껏 발휘하는 파이오니어(pioneer) 정치를 기대한다.
17년 전 우리 개혁파 정치인들이 기성 집권세력에 막무가내로 도전했던 정치사를 참고로 삼아주시면 좋겠다.
-지난해 4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됐다. 도서관정책위원회는 2007년 정치인 신기남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한데… 앞으로 도서관 관련해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을 것 같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있다. 그러나 경제에 비해 문화의 수준은 훨씬 못 미치는 현실이다. 문화선진국이야말로 진정한 선진국이다. 문화선진국을 건설하기 위한 첩경은 바로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최고의 문화적 인프라이고 선진국을 향해 항진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그러나 말만 앞설 뿐 실제로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매우 부족하다. 도서관이 진용을 갖추고 활발히 운영돼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도서관을 이끌어 갈 전문 인력을 적절히 배치하고 자료와 정보를 채울 수 있는 예산을 충분히 조달해 줘야 한다.
-소설가 ‘신영’으로서 좋은 책 몇 권 소개해준다면…
우리 소설로는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께서 여름휴가 때 읽어서 이슈가 되기도 한 김성동 작가의 소설 『국수』를 들고 싶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었던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민중의 삶을 마치 오늘 곁에서 목격하는 느낌이 들도록 생생하게 전해준다. 특히 우리말이 일본어에 의해 오염되기 이전의 원형을 복원해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계의 일대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국 소설로는 내가 소년시절부터 애독했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든다. 지금까지 한 서른 번 정도는 읽은 거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그런 감동과 재미를 함께 느끼는 소설을 쓰고 싶다.
문학작품이 아닌 책으로는 요새 읽고 있는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추천하고자 한다. 인간 정신의 진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 최신판을 보는 듯하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정신이 확 깬다. 내용이 무척 난삽하여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 의무감을 가지고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