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훔치다
빛을 훔치다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01.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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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햇살은 따사로우나 바람이 몹시 차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 근처 호수 둘레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때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한 분이 내 뒤를 따라온다. 동병상련이어서일까? 그 할머니가 왠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 할머니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다. 의외로 할머니는 나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실은 나의 걸음이 수족을 제대로 못 쓰는 할머니만도 못하잖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이 길을 수없이 힘차게 거닐었던 나 아니던가. 갑자기 내 처지가 서러웠다. 아직은 이렇게 무너질 나이가 아닌데 어쩌다 내가 이리됐을까?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면서 문득 오늘 걸려온 친정어머니의 전화 내용이 떠오른다.

“얘야! 너만 생각하면 밤마다 잠을 못 이룬다. 내가 돈 보따리 큰 거 안겨줄 테니 병원에 가서 네 몸에 좋다는 약 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졸라라. 내가 너를 어찌 키운 줄 아느냐?”라며 흐느끼던 어머니의 절절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치매에 시달리는 친정어머니께서 어찌 알고 이리도 애절하게 마음 아파할까.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자리보전한 지 거지반 열흘 만에 처음으로 바깥바람을 쐬게 된 것이다.

그동안 태양 빛이 못내 그리웠다. 겨울철이라 바람은 몹시 날이 섰지만 태양은 따스한 온기를 온 누리에 흩뿌리고 있었다. 호수 둘레길 양옆에 늘어선 벚나무도 어느 사이 그토록 때깔 곱던 단풍잎을 죄다 떨구고 나목이 돼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가으내 청초한 모습으로 피어있던 코스모스들도 시들은 대만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뉜다. 

어디 이뿐인가. 칼바람이 호수 변의 갈대들을 훑어대더니 곧이어 둘레길 바닥을 온통 휩쓸고 지나간다. 급기야 음료수 빈 캔, 검은색 비닐봉지까지 품에 안고 바람은 회오리로 둔갑해 허공을 세차게 돌아다닌다. 그뿐만 아니라 근처 야산의 나뭇가지, 전선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 소리가 윙윙거려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시끄럽다. 

사계절 중 유독 겨울이 싫은 이유는 추위보다 왠지 을씨년스럽고 오늘처럼 스산한 풍경 때문이다. 우주 만물의 고유한 빛을 앗아가는 것도 겨울 아니던가.

나에게서 삶의 활기를 빼앗아 간 것도 어찌 보면 이 음산한 겨울이다. 지난 초겨울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내려앉은 어느 날이었다. 식탁에서 무심코 일어나던 나는 갑자기 허리가 삐끗하더니 오른쪽 다리가 심히 당기어 촌보(寸步)를 옮길 수 없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날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 의자에 앉기조차 힘들었다.

하는 수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나는 당장 시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말에 눈앞이 아득했다. 또한 마음마저 흔들려 걸핏하면 홀로 눈물짓기 예사였다. 그렇게 열흘 가까이 지나던 오늘 아침 어머니의 애간장을 도려내는 듯한 애끓는 전화에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강한 의지력으로 바깥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로 했다. 처음엔 오른쪽 다리 신경이 몹시 당기면서 눈물이 찔끔 날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 나의 건재함을 보여 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고통을 참고 버텼다. 자연 나의 걸음은 느리고 부자연스러웠다. 

이 둘레 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을 비로소 마음의 눈으로 바라봤다. 햇살에 유난히 반짝이는 호수의 윤슬이 오늘따라 아름답다. 그 위를 유유히 유영하는 청둥오리 떼, 창공을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철새들의 청아한 울음소리, 그리고 호수 늪지를 뒤덮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 이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눈을 들어 무심코 바라보니 양지바른 길 한쪽에 간밤에 내린 흰 눈을 소복하게 뒤집어쓴 잡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힘이 절로 솟아 잰걸음으로 잡초 곁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토끼풀 아닌가. 갑작스레 닥친 이 혹한에 더구나 간밤에 눈까지 내렸건만 파릇파릇한 제 모습을 이토록 굳건히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것을 발견하자 병 앞에 무릎 꿇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한낱 연약한 토끼풀도 혹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데 어찌 내가 이만한 일로 절망의 나락 끝에 서 있었단 말인가. 만물이 북극 한파의 칼바람에 스러졌건만 토끼풀만큼은 제빛을 여전히 띠고 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은 음울한 계절만은 아니었다. 겨울은 소멸을 서두르는 것 같으나 동장군(冬將軍) 속에서도 ‘희망의 봄’과 ‘생성’이라는 기쁨을 채비하는 묵상의 계절이다. 

그날, 모처럼 따스한 볕을 쬐러 산책을 나갔다가 영원히 잃지 않는 빛을 한껏 가슴에 얻었다. 그 불멸의 빛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토끼풀로부터 몰래 훔쳐 온 희망의 봄, 푸른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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