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전범국 독일의 감춰진 피해… 성폭행 피해자만 86만명?
[포토인북] 전범국 독일의 감춰진 피해… 성폭행 피해자만 86만명?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8.12.24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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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기의 『현대사 몽타주』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속은 것이라면 '악의 평범성' 명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해방이 어떤 이들에게는 성폭력과 학살의 시작이었다면? 이 책은 현대사의 정설로 굳어진 역사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 발굴된 사료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해 세계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재해석한다. 저자는 "그동안 역사가 '승자의 역사로'로 기억됐기에, 오히려 역사가 은폐와 왜곡의 기제로 활용됐다"며 현대사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독일 라이프치히에 주둔한 소련군들이 길거리에서 독일 여성을 붙잡는 모습.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소련군이 전후 점령지 독일에서 수많은 독일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칫 나치 범죄를 희석하고 독일을 전범 가해국가가 아니라, 희생자 국가로 포장해 극우세력에게 좋은 미끼를 던질 것을 우려해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책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에 따르면 1945년 전후해 점령지 독일에서 연합국 군인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 수는 최소 86만 명에 달한다. 길거리에서 납치돼 성폭행 당하는 일이 많았지만, 집 안에 침입해 남자들을 쫓아낸 뒤 또는 심지어 가족이 있는 가운데 성폭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합국 군인은 독일 여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피해 여성들에게 1945년 5월 8일은 '해방'이 아니었다. 

한나 아렌트.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한나 아렌트.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유대인 출신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학살 수용소로 이송시킨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에 참여한 후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 태제를 제시했다. 태제의 핵심은 아이히만은 악마적 본성을 지닌 흉포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는 그저 '평범'한 관료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는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전문가였다. 상황을 잘 모른 채 명령을 따르거나 묵묵히 자기 과업만을 수행한 '탁상 가해자'가 전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인 빌렘 사센과 인터뷰에서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 역시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말해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1961년 3월 촬영한 가족사진. 왼쪽부터 호옥근 첫째 아들 현철, 레타네 홍.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1961년 3월 촬영한 가족사진. 왼쪽부터 호옥근 첫째 아들 현철, 레타네 홍.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2004년 독일 예나에서 유학하던 저자는 47년간 북한인 남편을 기다리는 독일인 여성 레타나를 만나게 된다. 레타나가 남편 홍옥근과 연을 맺은 시기는 1955년으로, 당시는 북한이 독일을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여기던 시기였기에 상당수 북한 유학생이 독일에 들어와 있었고 두사람은 그렇게 만나게 됐다. 레타나가 임신하자 두 사람은 곧장 결혼(1960년 2월)했으나 4월 14일 홍옥근에게 본국 소환 명령이 떨어져 이별하게 됐다. 3년 뒤에는 편지까지 끊겼다. 레타나는 독일과 북한 당국에 남편의 소식을 물었으나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에 저자는 2006년 <오마이뉴스>에 사연을 올려 도움을 요청했고, 또 국내 한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독일 외무부의 관심을 끌어냈다. 결국 2008년 7월 평양에서 47년만의 두 사람의 재회가 이뤄졌고, 이후 서신 왕래가 다시 시작됐으나 두 번째 만남을 앞둔 2012년 9월 4일 홍옥근이 사망하면서 레타네의 망부석같은 기다림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유럽연합이 틀을 갖추며 회원 가입의 무을 여는 계기가 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유럽연합이 틀을 갖추며 회원 가입의 무을 여는 계기가 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사진제공=도서출판 돌베개]

유럽통합사 최고 전문가인 독일 역사학사 빌프리트 로트에 따르면 유럽 통합의 추진력은 네 가지였다. 첫째, 전통적인 국가 간 협약이나 협력으로는 평화가 보장될 가능성이 없다. 양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개별 국가 사이의 협약으로는 유럽의 평화를 구현하기 어렵고 범유럽 차원의 정치공동체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에 유럽 정치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둘째, 독일 문제의 해결에 대한 열망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은 유럽 열강의 하나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했기에 독일이 팽창하지 않으면서도 고립이나 봉쇄의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유럽의 국제정치 질서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했다. 셋째, 유럽 각국은 시장 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장벽을 유지하면 생산력 확장을 기대할 수 없다. 산업을 유지하려면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넷째, 미국이나 소련같은 세계 열강들 속에서 유럽은 고유한 이익을 유지하고 관철할 필요가 있었다. 저자는 "유럽연합은 정치와 경제 이익을 위한 공동체이자 유럽평화를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현대사 몽타주』 
이동기 지음 | 돌베개 펴냄|422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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