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과거 방송이 발달하기 이전에 ‘호외’는 뉴스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지금 우리는 ‘호외’가 의미 없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호외'는 “대사건의 색인”으로써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이땅에 1,000여 건의 호회가 발행됐고, 이는 “언론사(史)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사(史)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84년 <중앙일보> 입사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입문해 <서울신문> 차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2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한 저자는 이 책에서 1876년부터 1995년까지, 그러니까 강화도 조약에서 전두환 구속까지의 호외 88점을 연대순으로 엮어 설명했다.
일본의 <도쿄니치니치신문>은 1876년 3월 2일자로 강화도 조약 체결 소식을 호외로 발행했다. 이 신문은 호외라는 용어 대신 부록이라는 용어를 스고 있는데, 당시에는 이 둘이 혼용됐다. <40쪽>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급습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옹립한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신보>가 이 사건을 호외로 보도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호외’로 기록되고 있다. <51쪽>
1927년 1월 23일, 나석주 의사가 일제하 경제 수탈의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호외로 보도한 <동아일보>. <95쪽>
김두한 의원 오물 투척 사건을 전하는 1966년 9월 22일자 <중앙일보> 호외. <176쪽>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
정운현 지음|인문서원 펴냄|416쪽|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