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안중근 의사의 치열했던 기록… 하얼빈에서의 11일
[포토인북] 안중근 의사의 치열했던 기록… 하얼빈에서의 11일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8.11.21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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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경의 『코레아 우라』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안중근 의사가 국권 침탈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저격하기 전후 사정을 담은 이야기다. 거사를 준비하며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을 쉽고 재미있게 기록했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하얼빈을 사전 방문해 탐색하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플랫폼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의 몸통에 세 발의 총알을 박아넣고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또 이후 가족의 곤궁한 삶까지 자세히 소개한다. 

동료들과 재판받는 안중근 의사 [사진출처=안중근의사기념관]
동료들과 재판받는 안중근 의사 [사진출처=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많은 나라의 관심을 받았다. 이런 시선을 의식해서였는지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변호인단을 배제하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를 임의로 배정해 제대로 된 변호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방청석도 일본인으로 채워 넣어 최대한 조용히 재판을 종결하려 했다. 일본 정부는 안 의사에게 '오해를 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안 의사는 오히려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제시하며 거절했다. 결국 재판부는 사형을 판결했다. 

안준생(맨 왼쪽)과 이토 분키치(맨 오른쪽) [사진출처=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준생(맨 왼쪽)과 이토 분키치(맨 오른쪽) [사진출처=위키미디어]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 가족은 30년 동안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면 살았다. 의거 당시 세 살이었던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취직을 해도 사흘이 못 돼 해고되기를 반복했다. 일제가 뒤에서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바 기요시라는 총독부 경찰이 안준생에게 접근해 일본행을 권유했고 안준생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제는 안준생을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라는 절로 인도하고 또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게 하면서 이 장면이 담긴 사진과 함께 '안준생이 아버지의 죄를 사과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에 안준생은 친일파로 잘못 알려지게 됐지만, 이후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한 아이바 기요시의 대화록이 발견되면서 일제가 꾸며낸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중근의사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 [사진출처=문화재청]
안중근의사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 [사진출처=문화재청]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직전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이 할 일이다'라는 뜻의 글을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남긴다. 안 의사의 곧은 절개에 감탄한 지바가 안 의사를 오래 기억하고자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지바는 아침저녁으로 위패를 모셨고 세상을 떠나면서도 '내가 없어도 안 의사의 위패는 모셔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증손자인 지바 세이치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사진출처=위키미디어]
이토 히로부미 [사진출처=위키미디어]

하얼빈 의거 후 옥에 갇힌 안 의사는 동아시아의 평화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비록 완성 전에 사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의 유작으로 남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에게 큰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통해 자기 민족의 이익만을 위하는 거짓 평화인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조명했다. 


『코레아 우라』 
한미경 지음 | 신민재 그림 | 현암주니어 펴냄|140쪽|1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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