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 손해배상 판결... 민족대표 33인, 태화관서 낮 술판 벌이다 친일?
설민석 손해배상 판결... 민족대표 33인, 태화관서 낮 술판 벌이다 친일?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8.11.16 18: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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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연합뉴스]
[사진출처=연합뉴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습니다. 태화관이라고. (당시 그곳) 마담 주옥경하고 (천도교 측 민족대표) 손병희가 사귀었어요. (3·1운동 당일) 그 마담이 DC(할인)해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민족 대표 33인이) 대낮에 그리로 가서 낮술을 막 먹습니다. (중략) 민족대표 대부분은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역사 강사인 설민석 씨가 2014년부터 책과 방송에서 밝힌 위와 같은 발언에 대해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 이동욱 부장판사는 “객관적으로 진실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역사 비평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 있다”고 밝혔다. 손병희는 술집 마담(주옥경)과 연인관계였으며 3·1운동 당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낮 술판을 벌였다는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다만 ‘민족대표 대부분이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허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민족대표 대부분이 3·1운동 가담으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도 지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점 등에 비춰 볼 때 친일반민족행위가 밝혀진 세 명(박희도·최린·정춘수)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허위임이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설 씨에게는 소송인 1인당 25~100만 원씩 총 1,4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정말 손병희는 술집 마담과 정을 나눴고, 민족대표 33인은 3·1운동의 역사적인 날 그 술집에서 낮 술판을 벌였을까? 또 이후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은 끝내 친일로 돌아섰을까? 일각에서는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먼저 술집 마담으로 지목된 주옥경(손병희의 아내 )은 비록 기생 출신이기는 하지만, 3·1운동 당시에는 이미 손병희와 결혼해 기생 신분을 벗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천도교여성회본부에서 출간한 『수의당 주옥경』에 따르면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세 번째 부인)해 천도교 활동에 매진했다. 결혼 전 기생으로 활동할 때도 주옥경은 몸을 파는 이·삼패(二三牌) 기생이 아닌, 가무를 선보이는 일패 예단(藝壇: 연예인)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실제로 1914년 5월 16일 자 <매일신보>에는 ‘서화(書畵)에 능한 주산월(주옥경의 기생 이름 )은 (‘기둥서방’이라 불리는 ‘별감’을 두지 않는 ) 기생을 모아 ‘무부기(無夫妓)조합’을 결성해 행수(조합장)에 올랐다’는 내용이 실렸다. 주옥경은 조합장 신분으로 인해 술집 마담(주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시 태화관의 주인은 전직 궁중 음식 책임자였던 안순환이었다. 또 당시 태화관에서 각종 모임과 만찬, 기자회견, 출판기념회 등이 개최됐다는 점에 비춰볼 때 오늘날 룸살롱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상당수 제기된다.

3·1운동 당일 상황에 대해 해방기 문학가인 전홍준은 글 「己未運動과 明月館事件(기미운동과 명월관사건 )」에서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속속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모여들었다. 정각 12시가 되자 독립선언서를 힘차게 낭독한 후 일동이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중략) 무장한 헌병과 경관들이 오기는 그 후 한 시간 만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런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민족대표들이 낮 술판을 벌이고 손병희가 만취한 상태로 자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그해는 고종황제가 사망해(1월 21일·암살 의혹) 전 나라가 슬픔에 잠긴 상황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불교·천도교도로 구성된 민족 대표가 마주해 만취할 정도로 마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흘러나오고 있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으로 옥고를 겪는 희생을 치렀으나 낮 술판에 더 초점이 맞춰져 비난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3·1운동의 파급력을 높이지 못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아쉬움이 작용한다. 애초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해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으나, 이후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단독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책 『Why? 항일독립운동』에 따르면 태화관에 들이닥친 학생들에게 민족대표 33인은 “자네들이 흥분해 자칫 폭력사태가 일어날까 걱정돼 우리끼리 선언식을 치르기로 했네, 하니 자진 해산하게나. 또 선언식이 끝나면 모두 자수해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네”라고 말했다. 대량 피해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안고 가겠다는 의지였지만, 너무 빨리 체포되면서 3·1운동의 불씨만 당기고 후속 전개를 주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제기된다.

설 씨 역시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의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지 않았고, 독립선언서 낭독 후 자발적으로 투옥됐다. 만세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이었다”며 “(이런 이유로 )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민족대표 대다수가 1~3년간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비판은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상황이다.

민족대표 대다수가 변절했다는 데 대해서는 재판부의 판결처럼 설 씨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해 당시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사 48명 중 친일로 판명 난 인사는 5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에는 최린, 박희도, 정춘수, 최남선, 현상윤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독립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최린은 출소한 후 192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에 올라 친일 행보를 보였지만,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을 당시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라며 참회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된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 특히 역사를 알려야 할 사명을 지닌 자들에게는 그 무게를 지탱할 엄중한 책임감이 밑받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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