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 데뷔작 ‘폴란드로 간 아이들’ 속 메시지... ‘상처, 가시 아닌 사랑되다’
추상미 감독 데뷔작 ‘폴란드로 간 아이들’ 속 메시지... ‘상처, 가시 아닌 사랑되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8.11.0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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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영화 스틸컷]
[사진출처=영화 스틸컷]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한국 전쟁이 한반도를 휘감았던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전쟁고아 1,500명과 폴란드 선생님들과의 애틋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는 배우로서 대중 인지도가 높은 추상미의 첫 영화감독 데뷔작으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로 더욱 주목을 받는다.

6.25전쟁 당시 한반도를 뒤덮은 전쟁의 화마는 숱한 고아를 양산했고, 남북한은 우방국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방식에서는 남과 북이 차이를 보였는데, 남한이 해외원조 단체 등 민간단체를 통한 해외입양에 치중했던 반면 북한은 정권 차원에서 사회주의 우방국에 ‘위탁 교육’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해성 폴란드 브로츠와프대학 한국학과 교수의 논문 「폴란드에 남겨진 북한 전쟁고아의 자취를 찾아서」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은 루마니아에 3,000여 명, 헝가리에 950여 명, 동독에 600여 명, 체코슬로바키아에 400여 명, 불가리아에 500여 명 그리고 폴란드에 6,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위탁했다. 영화는 가장 많은 고아를 거둔 폴란드, 그중에서도 시골 마을 프와코비체의 한 양육원에 위탁된 1,500여 명 전쟁고아와 그들을 돌보는 현지인 선생님들의 휴머니즘에 집중했다.

폴란드를 찾은 추 감독과 탈북 소녀 송이가 마주한 당시 양육원의 책임자였던 유제프 원장은 기차역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까만 눈에 까만 머리, 처음 보는 동양 아이들이었지만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선생님, 아저씨 같은 호칭 대신 ‘엄마’ ‘아빠’로 부르게 했다”고 설명했다. 유제프 원장이 “비슷한 유년 시절”이라고 언급한 것은 크게 ‘전쟁고아’ ‘도움의 손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약소국가로 주변국의 침략에 자주 휘둘렸던 폴란드는 독일 나치 지배하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식민지배와 전쟁의 역사를 간직했고, 해방 직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포화에 휩싸이면서 폴란드의 고아원마다 전쟁고아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악조건 속에 도움의 손길도 존재했는데, 이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인도의 지방 유력자인 잠 사헵 디그비자이신지(Jam Saheb Digvijaysinhji)는 1,000여 명의 고아를 직접 돌보고 5,000여 명의 고아를 다른 독지가와 연결해 주는 등 폴란드 전쟁고아를 돌보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폴란드 선생님들이 북한에서 넘어간 아이들 속에서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발견하면서 특별한 유대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오래가면 좋으련만, 7년 뒤인 1958년 김일성은 해외에 산재한 고아들을 복귀시키라고 명령했고 아이들은 또 한 번 부모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유제프 원장은 “일부 아이들은 자신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눈밭에 드러누웠다”며 “아프면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고 회상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이들의 복귀 이유에 대해 영화는 전후 복구 사업인 ‘천리마 운동’으로 인한 노동력의 필요를 지목했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박종철과 정은이 전북대 교수는 논문 「한국전쟁 이후 북한 재건을 위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원조에 대한 검토」에서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 이후, 사회주의 각국의 권력투쟁, 8월 (북한 내) 정권 전복 음모에 따른 숙청작업이 일어나면서 북한은 체제 단속을 위해 유학생과 고아의 동시 귀국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 확보의 이유가 없지 않겠지만, 당시 부각됐던 공산국가 간 갈등, 동유럽의 정치적 혼란(폴란드 파업 및 공산당 분열 등)이 주요한 이유로 여겨진다.

영화는 당시 전쟁고아들의 기구한 인생사를 송이의 삶에 투영한다. 경계인으로서 살아가는 송이의 삶을 지목하면서 우리 민족이 지닌 아픔의 역사가 현재 진행형임을 강조한다. 또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과정을 추 감독과 송이가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모습에 담아, 정치적 연합으로서의 통일과 함께 사람이 하나 되는 사회적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오랜 시간 선뜻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던 송이가 추 감독에게 자신이 겪었던 끔찍했던 탈북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비로소 하나가 됐듯이...

그렇다면 당시 북한으로 돌아갔던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 4일 서울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추 감독은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러시아어와 폴란드어에 능했기 때문에 그중 상당수가 정치가나 대학교수 등이 됐다”며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한 탈북자분은 ‘북한에서 자신의 학교 선생님이 어린 시절 폴란드에 다녀오셨던 분’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전쟁고아 중에서는 폴란드 대사(한의표), 폴란드 대사관 무관(한경식 인민군 대좌), 외교관(박동호) 등이 배출됐다.

추 감독은 “폴란드에서 만난 유제프 원장님은 내게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을 만나면) ‘그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며 “이건 제게 주어진 개인적인 통일의 소명이다”라고 강조했다.

어린이들을 따스하게 끌어안아 동질의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폴란드 선생님들의 ‘인간다운’ 모습이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통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 성향에 따라 좌우로 나뉘어 내가 겪은 아픔을 똑같이 되갚아주려고만 하는 모습이 더 눈에 띈다. 영화는 사랑에 대해, 특히 탈북자를 향한 사랑에 대해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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