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문학과 진보』는 나의 마지막 평론집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문학사 작업에 유관한 데만 전념해야 할 듯싶다. 읽을 것은 많고 시간은 많지 않다. 역시 비평은 젊어야 한다. 마침 세상이 변했다. 한반도 동아시아가 함께 부윰하다. 우리 앞에 놓인, 누구도 가지 않은 길 위에서 우리 문학은 또 어떤 몸을 지어갈지 벌써 궁금하다. <5쪽>
역사로부터 실종한 멕시코 노동이민의 운명을 다룬 김영하의 『검은 꽃』은 분명 민족서사시를 꿈꾸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멕시코는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멀다. 하와이 노동이민이 20세기 한미관계의 복합 속에서 모국과의 인연이 단절되지 않은 집단이라면, 그 ‘뻣센 에네껜 농장’으로 팔려간 멕시코 노동이민은 역사의 블랙홀로 사라진 ‘버림받은 백성’이다. (중략) ‘중도적인 주인공’을 축으로, 한 시대의 상층과 하층을 동시에 조망함으로써 총체성을 지향하는 루카치의 역사소설 모형은 이 소설과 거의 무관하다. 작가는 주인공이 부재하는 이 집단의 이야기를 집합적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렇다고 뤼시앵 골드만이 지적한, 주인공 중심 19세기 소설의 20세기적 변형의 하나인 집단적 주인공의 소설도 아니다. <129~130쪽>
문학의 위기론이 유행처럼 번질 때도 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문학의 위기는 영상언어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는 소설에 더욱 관계되기 때문이다. 귀족적 기원을 가진 시는 일찍이, 천출(賤出)에서 근대문학의 왕자(王者)로 등극한 소설에 지위를 양도했기에 독자 또는 시장과 그만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시가 독자의 집중적 시선 바깥에만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목숨을 건 반유신 투쟁으로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았던 김지하는 대표적이다. <237쪽>
『문학과 진보』
최원식 지음|창비 펴냄|424쪽|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