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길은 사라지고
굽고 휘고 뒤틀린 나무들 뒤섞여
더 깊이 더 무성히 울울한 여름 숲
문득 펼쳐진 낙엽송 군락에 서서
오랜전 사람들의 그림자를 본다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화전을 일구며 살다 간
쓰러진 고목 위로 귀틀집 혹은
너와집이나 굴피집 한 채 지어
몸 들였을 까맣게 그을린 삶들
맨손으로 도끼와 톱과 낫과 삽과 괭이를 부린
지도에서 사라진
고단한 빈손들이 어른어른 지나간다
- 여름 숲에서 그을린 삶을 보다 - <24쪽>
얼마 남지 않은 도심의 미로 같은 골목
익선동 어느 어귀에서 을지로까지
그 겨울 마지막 날 우리는 말없이 걸었고
그 침묵의 파동과 무늬를 느낄 수 있었다
을지로에는 을지문덕이 없다고 객쩍게 웃으며
신축 빌딩 앞 작은 자작나무숲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긴 포옹을 나누었다
야윈 자작나무와 핏기 없는 우리 얼굴이 닮았다고
한 번 더 멋쩍게 웃은 다음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그해 마지막 순환선 지하철 탑승구로 향했다
같은 원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는 두 삶이
서로의 몸속 가장 깊은 곳을 지날 무렵
암전이었다
- 암전 - <93쪽>
『너는』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171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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