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이미지는 시가 보낸 태초의 표정이다
[책 속 명문장] 이미지는 시가 보낸 태초의 표정이다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10.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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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금껏, 시는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마음씨 고운 친구라고 믿었고, 이 벗과 나누는 은밀한 교감과 다정한 대화의 기록이 비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우정의 연대가 내 환상의 소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의 곁으로 한발 가까이 다가가면, 시는 입을 앙다문 채 한발 물러서기 일쑤였다.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친구의 속내를 헤아릴 길이 묘연했다. 애타게 말을 걸어도 친구는 묵묵부답이었고, 이 말 저 말 물어봐도 모르쇠로 방패막이했다.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가 나를 완전히 외면한 건 아니었다. 등을 돌려 줄달음질하는 법도 없었다. 중언부언하는 내 얼굴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의 시선이 두려워 오금을 못 폈다. 허물없이 대했던 친구의 얼굴이 돌연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침묵으로 일관해 온 친구에게 줄곧 혼잣말만 해 왔던 것이 아닌가. 허망했다. 자괴감과 더불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는 혼돈에 빠졌다. 하지만 단념하지 않았다. <5>

모든 이야기의 단초는 서시에서 움튼다. 서시는 시적 서사의 맹아다. 이설야 시집을 여는 첫 시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에서 그 이야기의 발단을 찾아본다. (중략)

동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고, 사실과 환상이 착종된 인상적인 수작이다. 첫 장면부터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패러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화 속 소녀가 시적 화자로 호출된 것이다. 이 소녀의 불우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추운 겨울, 굶주린 채 눈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며 성냥을 파는 소녀가 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성냥 한 갑도 팔지 못하는 소녀는 그냥 돌아가면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매 맞을 것이 무서워 집에 가지 못하고 건물 벽에 기대어 손발을 호호 불다가 성냥을 태워 몸을 녹이고자 한다. 바로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시의 첫 행 앞에 잠복된 전사(前事). <342~343>

말하는 그림
류신 지음민음사 펴냄460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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