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여성의 결혼생활은 진정 자신의 삶인가
[책 속 명문장] 여성의 결혼생활은 진정 자신의 삶인가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7.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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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좋다. 여행 오길 잘한 것 같아.”

잔을 채우면서 여자가 씽긋 웃었다. 다행이네. 남편은 건배한 뒤 바로 잔을 비웠다. 술맛이 좋아서 여자도 한자을 다 마셨다.

“우리 돌아가면 더 잘 살자.”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는 더 이상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고 여자도 뺨이 달아올랐다. 10주년 기념 여행이라고 하기엔 조촐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속이 뜨듯하고 만족스러웠다. 앞으로의 10년은 어떨까. 아이의 성장에 맞춰 유동적으로, 아니면 멈춘 것처럼 잔잔하게, 그도 아니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까. 사실 지난 10년도 어떤 종류의 삶이었다고 규정하긴 어려웠다. 취기 때문에 여자는 말이 많아졌고 남편은 희미하게 변해버린 바깥 풍경에 자주 눈길을 줬다. <101쪽>

경찰은 비선대 쪽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설악산 일대로 수사를 확대해갈 예정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으며 여자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건가, 생각했다. 여자의 전화를 받은 K는 당황한 것 같았다. 여자가 그에게 먼저 연락한 건 처음이었다. 상황을 대충 말하자 담배 연기를 내뿜는지 한숨을 내쉬는지 K의 숨소리가 커졌다. 실종 사흘째가 됐다고 하니 K는 말을 잇지 못했다. <117쪽>

임신과 출산을 통과하는 동안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내가 바라던 삶과 방향이나 목적지, 경유지와 창밖으로 보이는 환경마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열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키기 힘든 상태였다. 승차권의 교환이나 환불 시기는 지나버렸고 되돌아갈 차편도 없었다. 출발지는 사라져버린 지명, 지역이 돼버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실려 가고 있고 더 가면 안 된다는 자각 속에서 아들을 낳아 키웠다. 아이의 얼굴에 살이 오르고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동안 우울감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이러다가 장을 보러 가는 길에 달리는 차에 뛰어들거나 쥐약을 모아서 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1-172쪽>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창비 펴냄|196쪽|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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