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오래전 추석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조카 녀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삼촌, 궁금한 게 있어요. 언제 어른이 되는지 궁금해요.”
조카의 질문이 겨냥한 과녁이 단순히 ‘어른’이라는 낱말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한 탓인지 난 어찌어찌하다가 동심을 무참히 파괴하는 견해를 내놓고 말았다.
“어른? 그게 되고 싶어? 굳이 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궁금해요. 난 언제쯤 어른이 되죠?”
“글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넌 진짜 어른이 될지도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고 조카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삼촌,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거든요?’ 하는 표정으로 날 차갑게 노려보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잔인한 대답이었다. (중략)
행복과 기쁨은 인생의 절반만 가르쳐줬다.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고르게 알려준 스승은 언제나 슬픔과 좌절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마다.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 조직에서 나를 지켜내야 하는가?’ 따위의, 삶에 그나마 보탬이 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중략)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니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지.” (중략)
세월 앞에서 우린 속절없고, 삶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다만 내 아픔을 들여다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을 견딜 수 있다.
“모두가 널 외면해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 돼줄게” 하면서 내 마음의 울타리가 돼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25-30쪽>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기주 지음|달 출판사 펴냄|241쪽|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