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의 예술가’·‘저항시인’ 김수영, 세상 떠난 지 벌써 50년
‘예술가들의 예술가’·‘저항시인’ 김수영, 세상 떠난 지 벌써 50년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6.1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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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연합뉴스>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올해 6월 16일(토)은 ‘모더니스트’, ‘저항시인’, ‘대한민국 유일의 예술가’로 불리는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김수영은 1921년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효제초등학교와 선린상고를 다녔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는 조선인 학병을 징집했다. 김 시인은 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한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해 통역 일을 하며 연희대 영문과 3학년에 편입했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귀국한 후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1946년에는 잡지 <예술부락>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다. 1949년에는 김경린 시인 등과 함께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이때까지 김 시인의 시는 ‘모더니즘(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단절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 경향)’적이었다.

그의 시가 저항적으로 바뀐 이유는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게 6·25전쟁은 육체적, 사상적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 시인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후퇴할 때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의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가 북한에서 강제노동하다 탈출했으나 북한군에게 다시 잡힌다. 김수영은 1953년에 출간된 잡지 <희망>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6·25 사변이 일어나서 석 달 사흘의 앞을 보지 못했던 까닭에 나는 8월 3일 소위 의용군에 붙들려 평안남도 북원리까지 갔다. 9월 28일 훈련소를 탈출해 순천(북한, 평안남도)을 앞두고 오다가 중서면에서 체포돼 다시 훈련소에 투입당했다.’ 김수영은 그 후 다시 훈련소를 탈출했는데 이번에는 대한민국 경찰에 잡히고 만다. 그 당시 경찰은 김수영에게 “어디서 오시오?”라고 물었고, 김수영은 “북에서 옵니다”라고 대답한다. 경찰이 다시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라고 묻자 김수영은 “사실은 의용군에 잡혔다가 달아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응 그러면 당신은 ‘빨치산’이구료”였으며 경찰은 권총을 그에게 겨눴다.

그 후 김수영은 이태원 육군형무소에서 인천 포로수용소로 이송됐으며, 다리 부상으로 다시 부산 거제리 제14 야전병원에 이송된다. 그러나 이 병원에는 공산당원들이 다수였고, 수용소 안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반공청년단을 해산하라는 시위를 하는 등 소요가 일어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감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치료를 받으러 야전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 남았던 그의 동료들이 공산당원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됐다. 그는 1953년에 잡지 <해군>에 발표한 「내가 겪은 포로 생활」이라는 글에서 이때 당시 심경을 ‘나는 울었다. 남겨 놓고 간 동지들은 모조리 적색 포로들에게 학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주 병이 들어 자리를 눕게 됐다’며 ‘나는 이리하여(원수를 갚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 글에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며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여졌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거제포로소에서 석방된 후 1955년부터는 <평화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차장까지 지냈다. 이승만 정권의 비리와 3·15부정선거에 반발해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1960년 4·19혁명을 기점으로 그의 시는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참여시’로 변모한다. 그는 1960년 8월 적은 글에서 ‘국무총리를 신파가 잡든 구파가 잡든 우리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오히려 우리들의 총 신경은 진정한 민주 운동을 누가 어떤 구실로 어느 정도까지 탄압하기 시작하느냐의 여부에 쏠려 있다’고 적었다. 그는 ‘우리들은 오랫동안 억압 밑에서 살아온 민중이라 억압의 기미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지극히 비굴한 것도 사실’이라며 ‘자칫하면 과거의 타성에서 수그러지기 쉬운 국민의 혁명적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런 운동에 원수가 돼서는 아니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정치가들이 국회 안에는 산더미같이 와글거리고 있는데 바깥의 현실은, 비근한 예가 경북 교조(敎祖)나 경방(京紡) 파업 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를 대하는 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며 노동자와 노조를 대변했다.

그러나 김수영을 그저 ‘저항시인’으로만 기억한다면 섭섭하다. 그는 낭만주의를 극도로 구현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가 펼친 시론과 문학론, 그의 창작과 사회의 자유에 대한 사상은 문학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칭송받는다.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탐구적이고 가장 준열하고 우상 파괴적이며 가장 유연한 시적 양심”이라고 말했으며, 김행숙 시인은 “김수영은 펄펄 살아있다. 김수영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고 칭송했다.

“내가 말하는 나이는 반드시 늙었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이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청춘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현명한 독자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54. 「갸냘픈 역사」)

“실제 자기가 아파 보지 않고는 남의 아픈 것은 모른다. 이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를 나는 요즈음 치질을 앓으면서 다시 한번 생생히 체득했다. T.S. 엘리엇의 말마따나 우리는 누구나가 다 환자다.” (1961. 「소록도 사죄기」)

“나는 철이 나서부터는 변소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에겐 똥이라는 것이 조금도 더럽지 않다. 고약한 취미라고 나무랄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세상에는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너무나 많다.” (1962. 「가난의 상징」)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롯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1963. 「요즈음 느끼는 일」)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1966. 「모기와 개미」)

요즘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예술가 김수영. 시인의 50주기를 기념해 민음사에서는 시인의 첫 시집이자 생존 시 발간된 유일한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복간했고, 올해 초에는 김수영의 산문과 시를 담은 『김수영 전집』을 출간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오늘은 ‘저항시인 김수영의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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