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인 나인줄 정말 몰랐을까?
그 아인 나인줄 정말 몰랐을까?
  • 관리자
  • 승인 2006.04.0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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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수필가·본지 칼럼리스트)


 

혹여 어느 하늘아래에서 아직도 내가 겪었던 악몽(?)을 또 다른 어린아이들이 겪게 될까봐,..

요즘엔 거의 다 집에서 간단한 샤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겨 자주 대중탕을 이용하는 이들이 그 전보다는 많지는 않을 거라 생각된다.(다시 말해 때를 밀기 위한 대중탕 이용)
30여 년 전,엄마와 함께 목욕을 하러 대중목욕탕엘 갔던 기억들 속에 아직도 어렴풋이 나를 몹시 부끄럽게 하는 기억 하나,

내 나이 8살, 그 날도 휴일아침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일찍 일어나 목욕을 가라는 엄마의 기상잔소리에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요일인데도 그 맛있는 늦잠 한번 못 자게 하는 우리 엄마가 더러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아침 일찍 목욕탕엘 가야 번잡스럽지도 않게 목욕을 할 수 있으니 아마도 그렇게 자꾸만 잔소리를 하셨나 보다.
창문을 열고 이부자리를 개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의 하시는 말씀.
'정아, 밥먹고 아버지랑 목욕하고 온나.'
이 무슨 말인감?
'아버지?'

'그래, 엄마가 오늘 볼 일이 있어 바쁘니 아버지하고 목욕하러 가.'
아버지께서는 남자이고 난 여자인데 어떻게 함께 목욕탕엘 가라는 말씀이신지.
'엄마, 나중에 엄마랑 저녁에 가면 안되고?'
'오늘 엄마는 목욕하러 못 가,일이 있어서.얼른 밥 먹고 목욕부터 하고 와.'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가야하고..아버지를 따라 여탕이 아닌 남탕엘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침밥이 내 목구멍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그나마 조금 시간을 벌어보겠다고 이것저것 목욕장비를 챙기는데 평소에 안 하던 부지런을 떨었더니, 옆에서 아버지께서는 내 맘도 몰라주고 자꾸만 재촉만 하시더라.

그러다가 문득,
어차피 내가 운이 없어서 꼭 아버지랑 함께 지금 목욕을 하러 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너무 지체를 하는 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많아질 거고
여자인 내가 감당해야할 창피스러움도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
'그래 어차피 갈 거면 빨리 갔다 오는 게 더 낫겠다.'

목욕탕 입구에서 표를 건네주는 우리 동네 목욕탕 아저씨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버지랑 목욕하러 왔네.'
그 건네는 인사조차 나를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고개만 푹 숙이고선 드디어 남탕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지.

'후유..'
정말 다행스럽게도 목욕탕은 텅텅 비어있었다.
휴일이라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늦잠을 자는 통에 그나마 내가 시간을 벌 수 있는 행운이 온 것일까? ^^
'난 참 운이 좋다.' ^^

빨리빨리 서둘러 비누칠을 하고 후닥닥 머리도 감고 설렁설렁 때도 좀 미는 척도하고.
그러다가 난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 운이 좋은 아이가 아니라 너무나도 불행한 아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지.
탕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어른이고 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
아뿔싸,..

그 아이는 바로 4반 남자아이였다.(난 3반이었고)
'난 이제 끝이다.'
그러나 절대 포기는 금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를 자세히 볼 수는 없을 것임에 잠시 안도하곤.
그러나 난 한 가지 잊은 게 또 있었다.
이것저것 얼렁뚱땅 대충 가리고 옆 반 남자아이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치렁치렁한 내 이 긴 머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잠시
물을 끼얹는 소리만 들리던 목욕탕 안의 그 조용함을 깨뜨리는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
'정아 이제 가자.다했으면..'
우리 아버지 땜에..
정아 라고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옆 반의 남자아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피할까 아니면..'

아니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내가 고개를 돌리거나 한다면 더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몰라.
고개를 바로 들고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려 최대한 긴 머리를 가리며
이것까지는 괜찮다.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목욕탕에서 만약 불이 났다면 당신은 어떤 부분을 가리고 뛰쳐나올 것인가? 란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뛰쳐나오겠다는 의견을 많이 내세우더군.
나 역시 얼굴만 가리면 그 어떤 치부가 드러난다 해도 일시적인 창피일 뿐 일 테니 하며 위안을 삼고선 얼굴을 가릴 것이라 대답했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러나..

이제 난 어디를 가려야 하나?
얼굴도 가리고 여자라는 사실도 모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이미 '정아'라는 여자의 이름을 듣고 호기심 가득한 저 남자아이의 시선을 내가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완전히 남탕을 나갈 때까지 숨기기엔 역부족 일 일 테니,
(계속 쫓아와서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도 지켜보면 더 큰 창피일거)

얼굴을 가릴게 아니라 내가 여자인 부분을 가리기로 했다.

그 남자아이의 이상야릇한 시선을 뒤로한 체 나는 수건으로 밑을 걸치고 아버지와 함께 아주 당당하게 그 목욕탕을 걸어나왔었지.
걸어나오는 그 몇 초간의 시간이 내겐 몇 십 년이 걸리는 것처럼 입술은 바짝 마르며 식은 땀이 주르르 등을 타고 내리더라.

드디어 탈의실에 내가 있고..잠시 후엔 탈출
시원한 바깥바람이 내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날리게 한다.
날려버려라..내 머리카락..!!
이 원수같은 긴 내 머리카락아....

(후기)
 다음 날
학교에서 그 남자아이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그 아이 계속 나를 주시하며 옆의 또 다른 남자아이와 귓속말을 했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이 곤두섰지만 그 자리에서조차 난 아주 태연한 척 마지막 연기를 했었다.
내가 조바심 내고 불안하게 보인다면 어제의 목욕탕에서의 부딪힌 사람이 나임을 확신할 테니
아무런 말없이 나 역시 오히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남자아이의 눈을 힐끔 쳐다보곤 관심 없다는 듯이 내 반으로 들어왔다.
그 이후로 그 남자아이 나와 복도에서 부딪혀도 나를 더 이상 빤히 쳐다보지는 않더라.

한번의 그 목욕탕 사건으로 아주 질려 버릴 만도 한 내가 꼭 한번 더 그 이후에 다시 남탕엘 간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간 것은 누가 꼭 가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의였음을,..
아버지와 함께 시설 좋은 사우나로 목욕을 나서며 하는 오빠의 자랑 섞인 그 말만 없었다면..
'아버지랑 목욕하고 우리 청탑에 가서 함박스테이크 먹을 거다.'
'나도 함박스테이크 먹고싶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졸라 함께 사우나로 갔던 일,
때를 밀어주시는 그 곳의 아저씨가 웃으며 내게 한 말,
'아가야 다음부터는 엄마하고 목욕하러 가라..'^^
그 말에 찔끔 부끄러웠지만, 목욕을 끝내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함박스테이크를 먹을 그 순간엔..
그 아저씨의 말씀도 다 잊어먹고 난 마냥 행복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독서신문 1392호 [20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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