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도덕적 혼란으로 가득 찬 우리 시대의 대서사시
[책 속 명문장] 도덕적 혼란으로 가득 찬 우리 시대의 대서사시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5.25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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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그들은 국제 불법 거주자 권리 옹호 단체에 관한 인식을 사람들에게 고취하고 미국 반핵운동과 연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낙천적인 분위기의 빈민가 벽화 앞에서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여기 온 것처럼 보였다. (중략) 그날 스티븐의 아내는 이스라엘의 핵무기 프로그램이라는 주제를 놓고 아나그레트에게 싸움을 걸었다. 스티븐의 아내는 미녀에게 무조건 반감을 품는 유의 여자였다. (핍에게는 반감을 품기는커녕 엄마 행세를 하려는 것을 보면 그 여자의 눈에는 핍의 외모가 변변찮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31쪽>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해 조금이나마 거리낌이 느껴지면 그는 그걸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역겨운 나라 탓으로 돌렸다. 그는 공화국이 규정한 대로 존재할 뿐이며 공화국이 요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역할은 바로 ‘섹스를 목적으로 반사회적인 부류를 홀리는 유혹자’라고 여겼다. 그는 스무살이 넘는 남녀를 믿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특권을 누리는 집안 출신이었다. 부유한 카를마르크스 거리에서 살다 추방당한 잘생긴 금발 왕자였다. 목사관 지하실에서 살면서 형편없는 통조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그는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은행 계좌가 없는 대신 머릿속에 섹스 장부를 두고 정기적으로 점검을 했다. 첫 상대와 최근 상대의 이름뿐 아니라 정확한 순서까지 기재된 장부였다. <121쪽>

그는 증오의 논리를 따랐다. “어차피 누군가의 삶은 망가지게 돼 있어. 그놈이랑 내 삶이 망가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나는 이미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살고 있어. 차라리 진짜 감옥에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잘 먹고 살겠지. 정부가 대주는 비용으로 책도 읽을 수 있어. 넌 학교에 다니면서 엄마가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드리면 돼.”

아나그레트는 피식 웃었다. “퍽이나 좋은 계획이네요.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사람을 죽이겠다니.”

“미리 경고하지 않고 기습하면 되겠지.”

아나그레트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을 보듯 쳐다봤다. <147쪽>


『순수』
조너선 프랜즌 지음 | 공보경 옮김│은행나무 펴냄 | 828쪽 | 1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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