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시 명예훼손… 양예원 등 피해자에게는 ‘명예’ 아닌 ‘멍에’
사실적시 명예훼손… 양예원 등 피해자에게는 ‘명예’ 아닌 ‘멍에’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5.24 08:58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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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초등학생 때 한 교사에게 촌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교사로부터 폭행과 온갖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유튜브 스타 유정호씨는 해당 교사에게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동영상을 올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주장했고,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했다. 이와 유사하게, 피팅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유튜브 스타 양예원씨도 고소당할 위기에 처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와 관련된 청와대 청원 및 여론이 들불처럼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많은 나라에서 사문화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서 구독자 수 66만명 이상을 보유한 인기 유튜버 유정호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촌지를 요구했다”며 “어머니가 요구에 불응하자 3학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매를 맞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동영상은 누군가의 신고로 삭제됐으며, 유씨는 그 동영상 때문에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했다. 그는 그 후 또 동영상을 올려 “변호사를 선임하고, 고소에 대응하느라 2000만원 정도를 썼다”고 밝혔다.

구독자 17만명을 보유한 인기 유튜브 채널 ‘비글커플’의 양예원씨는 3년 전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에서 구한 피팅모델 아르바이트에서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백했다. 자물쇠로 잠긴 밀폐된 공간에서 양씨는 20명이 넘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추행당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양씨에게 해당 ‘성추행 촬영’을 강요했다는 의혹을 받는 해당 스튜디오 대표는 “양씨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양예원씨나 유정호씨 같은 피해자들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져도 그 ‘사실’이 ‘공익성’이 없다면 ‘사실을 밝힌 것 자체’가 피해자의 죄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법 307조 1항에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적혀 있다. 형법 310조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그 사실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적혀 있어 만약에 ‘사실’이 ‘공익적’이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양예원씨나 유정호씨, 수많은 ‘미투 운동’을 하는 피해자들은 ‘사실’을 털어놓더라도 그것이 공익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심지어 공익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기 위해 막대한 변호사 법률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피해 사실의 공익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는 2차 피해이며, 피해자가 피해를 밝히기 어렵게 하고, ‘미투 운동’을 막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5일 현직 변호사, 대학교수 등 330명의 법률가가 사단법인 ‘오픈넷’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법”이라며 “미투 운동을 비롯해 추후 우리 사회에 있을 용기 있는 내부고발이 위축되지 않도록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존재는 피해자들이 성폭력 등의 피해 사실을 알린 자체만으로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역(逆)고소 당해 수사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이게 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며 “말한 사실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으나, 이는 곧 ‘공익을 위하지 않은 진실은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며 표현의 자유를 공익 목적을 위해 행사하도록 제한하는 것으로써 위헌적이고 공익성도 모호하고 불명확한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와 국회는 사실상 반대 견해를 표했다. 지난달 10일 국회에서 열린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 관련 당정 간담회’에서 법무부는 “가해자가 성폭력 내용에 대해 퍼뜨리면 제재할 방법이 사라지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고, 국회입법조사처 또한 이런 논리에 동의했다.

그러나 ‘명예훼손죄’ 자체를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드물다.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명예훼손을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독일도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만 처벌한다.

평생을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김광민 변호사는 그의 책 『헌법 쉽게 읽기』에서 ‘명예훼손죄’ 자체를 “사라져야 할 법”이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중세 시대 귀족은 명예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다. 기사(騎士)라는 무사(武士) 집단이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던 봉건제 사회에서 무사 간 결투는 하나의 관습이었고, 무사가 결투 중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라며 “그러나 현대에는 귀족이라는 계급 자체가 없다. 특별히 더 보호받아야 할 명예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두가 평등해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존재하지만, 신분에 대한 예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제 사회 구성원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게 됐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고 경쟁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 의사 표현을 제한할 수 있는 모욕이나 명예훼손은 존재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유정호씨는 지난 17일 자신의 채널에 동영상을 올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을 부탁했다. 그는 “UN 인권위원회에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다”며 “딸을 가진 사람으로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며, ‘미투 운동’을 할 때 사실을 말했다고 벌을 받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그가 동참을 바랐던 청원과 유사한 청원이 계속 올라오고 있으며 한 청원(‘사실을 말해도 고소당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해주세요’)은 4만2929명이 참여했다. 많은 이들이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규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명예’라는 단어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멍에’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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