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옛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책 속 명문장] 옛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3.27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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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공자는 행단 위에 계셨고
석가는 쌍수 아래 계셨네.
고금의 성인과 현인 가운데 그 어찌 독존한 분 있었나.
쯧쯧
내 인생 끝이로구나.

이 글은 본관이 무엇이고 누구의 후손이며 언제 과거에 급제하고 어떤 벼슬을 거쳤으며 어느 때에 삶을 마쳤는지 간단하게 기록하고, 그 끝에 어디에 장사 지냈다고 적었다. 관직 생활에 대해서는 비록 큰 치적은 없었으나 세속의 비루함에 휩쓸린 적도 없었다고 간단히 평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73세에 병으로 삶을 마쳤다고 적었을 따름이다. <39쪽>

한 번 그대를 보고픈 생각이 간절했는데
무궁한 곳으로 떠나가면 온갖 일 공허하겠지. 
다만 해마다 산엣 달이 아름다워
깨끗한 빛 예전처럼 우계를 비추리라

생전에 쓴 자서전은 한 인간의 삶을 완결해서 보여 주지는 못한다. 글을 쓰는 어느 누구도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이어질 자기 앞의 삶을 결코 명료하고도 온전하게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글쓰기 이후에 허여된 시간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그 허여된 시간의 삶을 자서전적 글쓰기는 결코 미리 정지시켜 두지 못한다. 삶은 이토록 극적이다. 더구나 죽은 이후의 평가는 또 어떻게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102~103쪽>

암벽 사이에 무너진 절 빈터만 남은 곳
홀로 와서 지팡이 놓고 누워 솔바람 소리 듣는다.
높은 봉우리에 앉으니 천상에 앉은 듯하고
대륙이 푸른 바다에 둘리어 있도다.
멀리 시선 주면 까마귀섬은 하얀 물안개 속에 가물가물
눈물을 훔치노라, 우산(牛山)에 석양이 붉을 때
사람들 돌아가면 새소리만 즐겁게 지저귀고
목동은 송아지 몰아 제 갈 길 가리라

퇴락한 절의 빈터에서 우산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은 왕조의 쇠망을 서글퍼하는 심리를 담고 있는 듯하다. 자찬묘지명에서 가문의 내력을 노래한 것도 그런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미래를 자손들에게 기탁하지만 과도한 기대는 없다. 시대의 아픔을 내면에 감추고 묵묵히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 자손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일. 이것은 어느 시대에 속해 있든 일흔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624~625쪽>

『내면기행』
심경호 지음 | 민음사 펴냄 | 766쪽 |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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