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결국 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어"
[책 속 명문장] "결국 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어"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2.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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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이게 다 뭐람…. 나는 한 달째 그의 책상 위에 방치된, 압화처럼 노르끼해진 결혼계약서를 노려본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면 안 되는 거였다. 관계의 유보된 해지는 관계의 명백한 지속보다 나을 것이 없다. 혹,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증발한 것은 돌아오기 위해 결말을 유보한다는 뜻이었을까? 서재 창 너머로 가을 하늘은 삼십 년 전 그 어느 날의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덧없이 푸르르다. 마지막 춤사위라도 보이겠다는 듯 낙엽 몇 닢이 그 빛살 찬 허공을 어지러이 선회한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니… 이미 기다리고 있는 걸까? <21쪽>

누군가의 관심이고 싶고 또 누군가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더욱 싫은 내 무력함. 이제 간단하고 저렴한 만큼 극대화되는 내 행복의 반비례 법칙이 곧 확인될 것이다. 이 모든 게 함께 살고 싶다는 사실의 반증이란 걸 또 자각하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신의 매질이 그치질 않는다. 하도 맞아 아픈 감각이 없어도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53쪽>

불치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지금, 난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어. 처음엔 이런 몹쓸 병에 걸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오히려 하루빨리 죽고 싶을 정도로 편안해. 요즘 주변에서 암에 걸려 죽어가는 인간들이 어찌나 많은지 몰라. 따지고 보면 인간 자체가 암이니까,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다음 날 아침, 김 노인은 깨어나지 못하고 영영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각 신문 부고란에 그의 사망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전직 국정원장 김모씨 지병으로 별세. 한 달여 만에 고독사로 발견됨.> <82쪽>

인류 모든 사람이 사망판정을 받게 된 건 수십 년이 더 지나서였다. 세계 정부는 인류 최후의 생존자를 찾는다며 구인광고를 냈지만,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혼자 살았고 가족도 친구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혼자 지내는 걸 편하게 생각했다. 수만 명이 살 수 있을 만큼 넓은 지하벙커는 바퀴벌레와 쥐, 꼽등이의 차지가 됐다. 사람들은 저마다 혼자만의 작은 벙커를 만들어 땅속 깊숙이 숨어들었다. 최후의 날이 왔지만, 엄밀히 말해 인류 최후의 날은 아니었다. 인류 최후의 날이 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20쪽>

하느님은 당신의 품을 찾아올 혼령들을 위해 여든여덟 개의 보랏빛 왕관을 준비해 놓았지만 혼령들은 갈림길에서 저마다 고민에 빠졌다.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가 육체를 가진 유한한 삶을 선택할지, 육신의 쾌락과 고통의 이중주 없다는 영혼을 지닌 영원한 하느님 세계로 오를 것인지. <129쪽>

춘희는 갸우뚱했다. 팔은 밖으로 굽히는 거 아니었나? 팔을 들어 굽혀보았다. 팔은 카톡 속의 막내와 핸드폰 안의 수많은 사람들 쪽으로 굽혀졌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춘희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서 마주 보고 있는 춘희를 향해 팔을 굽혔다. 거울 속의 팔도 춘희를 향해 굽혀왔다. 나를 향해 굽혀주는 팔도 있었구나! 행복해졌다. 춘희는 거울 속의 춘희에게 말했다. 고마워. 내 편이 되어줘서. <151쪽>

마침내 그는 손을 펴고 편히 누웠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70년은 너무 길었다. 하루하루는 너무 금방 지나갔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느낄 틈 없이 무언가가 다가오고 곧 사라졌다. 이제 그의 몸도 그리될 것이다. 누가 그의 팔을 흔들었다. 말소리는 멀어졌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 그의 몸을 둘러쌌다. 그는 딱 한 번 눈을 떴다가 감았다. 흐릿한 하늘만 눈에 가득 찼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87쪽>

『혼자, 괜찮아?』
이진훈 등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소속 26명
 지음 | 문학의문학 펴냄 | 288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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