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평가하지마, 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이야"
[책 속 명문장] "평가하지마, 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이야"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2.0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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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종점에 멈추는 마을버스 노선은 두 개뿐이었고, 차고지는 멀리 떨어진 허름한 공터에 있었다. 비가 오면 낡은 천막 틈으로 빗방울이 모여 떨어졌다. 천막의 올이 몇 가닥쯤 풀려 바람에 흔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정류장 안에서도 우산을 펼쳤다.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초 때문인지 풀 냄새가 났다. 파이프는 빗물에 녹이 슬어 기댈 수 없었다. 정류장의 모든 것은 외로웠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기댈 곳이 없었다. <9쪽>

 

조악하게 편집된 비디오에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지만, 아이들 말고도 젊은 시절의 그녀가 있었다. 포켓에 청색 무늬가 덧대진 주황색 체크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늘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의 아이는 계절마다 유치원복을 갈아입고 선생님은 매번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었지만, 그녀의 옷은 변하지 않았다. 비디오 속의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겠지만, 그 시절 그녀는 비디오 밖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모르고 살았다. <25쪽>

밤이면 등대지기는 무엇을 할까. 달, 별, 구름, 바다, 수평선, 바닷가에는 추억이 될 것들이 많지만 등대지기라면 창에 비친 자신을 보는 일도 있지 않을까.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창에 비친 자신이 겹쳐 보이면 그것만큼 고독하고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는 창에 비친 자신과 어두운 상영관을 겹쳐 보다가 영사실의 문을 잠갔다. 바깥은 어두웠고 노랗고 반짝이는 별이 많았다. <36쪽>

바닷가에는 우리처럼 겨울 바다를 보러 온 여행객 몇몇이 전부였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만을 따라 이어졌다. 겨울 바다가 쓸쓸한 이유는 다만 찾는 사람이 적어서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전혀 쓸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잠깐 바다를 보는 중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을 따라가려는 듯 찰랑였다. 코끝은 빨개졌고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따뜻한 캔 커피가 아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먼저 다 먹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말을 하면서. <59쪽>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방치되었다가 쓰러지다가 허물어지다가 희미해진다. 한 줌의 기억에 의지해 나는 당신의 집을 그려 봤다. 어쩌면 파란색 철문의 문고리를 물고 있는 짐승은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 혹은 독수리나 기린일지도 모른다. 아궁이에 올라가 있던 것은 가마솥이 아니라 커다란 돌절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당신의 등일지도 모른다. <102쪽>

사랑을 모르던 시절에는 사랑의 형태를 그릴 수 없었다. 막연히 떠올리는 것은 대부분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추측하여 느낄 만큼 섬세하지 못했다. 드라마 혹은 영화 주인공에게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정 일부를 다만 사랑일 것이라 단 정지었을 뿐이다. 한없이 우울해지거나 가련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 잠시라도 사랑한다면 평생 기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연민 같은 걸 사랑이라 여겼다. <181쪽>

『숨』
모자 지음 | 첫눈 펴냄 | 240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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