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 '800원'의 감춰진 비밀
책값, '800원'의 감춰진 비밀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2.05 18: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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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얄팍한 마케팅 전략 지양해야…

[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기』 1만2,800원, 『문과생을 위한 이과 센스』 1만3,800원, 『부러진 사다리』 1만4,800원, 『만화, 세상을 그리다』 1만5,800원. 이 숫자들은 최근 판매되고 있는 책값으로, 단위별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1만원, 1만4,000원, 1만8,000원이 아닌 책값에는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800원', 소비자가 저렴하다고 느껴…

에세이 『언어의 온도』 1만3,800원,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1만4,800원, 시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1만2,800원으로 에세이, 소설, 시 등 카테고리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책들이 애매한 가격으로 책정돼있다.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던 20대 김씨(27)는 “1만3,800원은 1만4,000원보다 저렴하게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 같지만, 지금 보니 1만3,800원은 굉장히 애매한 가격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처럼 1만3,800원은 애매하기 그지없는 가격이지만, 대부분의 출판사가 1만3,800원의 책을 계속해서 발간하고 있다.

이 가격은 ‘책값에 대한 소비자 심리’와 관계가 깊다. 2015년 대학내일 20대연구소가 대학생 3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책값이 비싸다’고 답한 학생이 83.5%에 달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2009년 조사한 결과에서도 책값이 일반 물가에 비해 ‘비싸다’고 생각한 사람이 45.4%로 과반수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작년 우리나라 평균 책값은 1만4,678원이다.

이렇듯 책값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반수에 달하는 현실에서 1만3,800원이라는 애매한 책값이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등장했다. 교보문고 마케팅지원실 브랜드관리팀 담당자는 “책 읽는 사람이 매우 적고, 그나마 읽는 사람도 책이 비싸다고 말하고 있으니, 최대한 저렴하게 느끼도록 하는 게 서점 입장에서는 관건”이라며 “1만3,800원이라는 책값의 가장 큰 비밀은 이런 마케팅 전략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만3,800원처럼 반올림된 숫자보다 아주 조금 낮은 숫자로 매겨진 가격을 ‘단수 가격’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심리적으로 훨씬 더 저렴한 느낌을 주며, 한때 유통업계에서 90원, 900원, 9,000원으로 끝나는 가격이 유행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그러나 이제 소비자들이 900원이라는 가격에 속지 않게 되면서, 출판업계에서는 더 저렴하게 느낄 수 있는 가격으로 800원으로 끝나는 가격을 많이 선택하고 있는 추세다.

왜 유독 1만4,800원 책이 많을까?

교보문고에서 지난달 24일부터 30일까지 집계한 ‘종합 주간 베스트 20위’ 안에 든 『가면산장 살인사건』, 『다이어트, 진리는 정신개조』, 『예언』, 『청춘의 독서』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 에세이 그리고 인문 등 장르 불문하고 이 책들은 모두 1만4,800원으로 동일하다. 애매한 가격을 달고 있는 책 가운데서도 최근에는 유독 1만4,800원의 책이 많이 발간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20~30대 직장인 2,427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직장인 하루 평균 지출액이 1만4,800원으로 밝혀졌고, 이는 곧 책값을 정하는데 영향을 줬다. 최근 출간된 『콘클라베』를 1만4,800원으로 책정한 알에이치코리아 관계자는 “1만4,800원은 큰 가격 저항력 없이 두께 있는 번역 서적을 집어 들게 하는 마지노선”이라고 설명했다.

SF 소설 전문 출판사 아작이 발간한 책은 거의 모두 1만4,800원이다. 지난달 25일 출간한 『별의 계승자』 3권도 마찬가지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소설의 경우 순수 제작비만 책값의 30%에 달하고, 유통비나 번역비 그리고 인세 등을 합치면 책 한 권 제작하는 데 7,000~8,000원가량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작 관계자는 “서점에 납품할 때는 정가의 60~70%를 받기에 수익을 창출하려면 권당 1만5,000원 정도는 받아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격을 저렴하게 느끼도록 하려고 ‘8단위’ 마케팅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노블 전문 출판사 미메시스가 400쪽에 달하는 양장본 신작 『못 그린 그림』을 1만4,800원에 책정한 데는 ‘가구당 월평균 도서 구입비’와 관련 있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가구당 월평균 도서 구입비는 1만5,335원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미메시스 관련자는 “책이 모두 컬러이고, 일반 책보다 두꺼운 종이를 사용해 제작비가 두 배 든다”면서도 “만화책이 1만5,000원이 넘으면 ‘왜 이렇게 비싸냐’는 반응이 먼저 나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무료배송’, ‘할인판매’ 오히려 ‘책값’ 높여…

1만2,000원 책과 1만1,000원 책 중 어느 쪽이 더 저렴할까. 답이 정해진 질문 같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0원 더 비싼 책을 구입하는 쪽이 결과적으로 돈을 더 절약할 수 있다.

그 비밀은 ‘배송료’에 있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들이 출간 18개월 미만 신간에 10% 할인을 해주고, 1만원 이상 구매하면 배송료를 면제해주고 있다. 따라서 1만2,000원 책을 구입하는 고객은 10% 할인해도 1만800원이기에 배송료를 면제받을 수 있는 한편, 1만1,000원 책을 살 경우 10% 할인을 하면 9,900원으로 배송 면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배송료 2,500원을 지불하면 총 1만2,400에 책을 구입하게 되는 셈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무료배송’ 조건이 책값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됐다. 출판업계에서는 “요즘에는 책값을 정할 때 10% 할인 가격에도 무료배송이 가능한지 고민한다”며 “독자들이 무료배송이 가능한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 책값을 1만1,500원이 넘는 선에서 책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서점의 할인 폭도 고려 대상 중 하나이다. 출간한 지 18개월이 지난 책들은 도서정가제의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간혹 30~50%까지 할인 판매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책을 팔아도 출판사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출판사들은 18개월 이내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도록 책값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출판사의 숫자 장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최저임금·물가 인상 등으로 할인 여력이 거의 없는 출판사들의 고심 끝에 1만4,800원이라는 애매한 책값이 등장하게 됐다. 그러나 ‘2016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15년 국내에 출간된 책 4만5,213종의 평균 정가는 1만 4,929원으로, 한국의 책값은 영미나 유럽권의 신간 평균 정가 2만원~3만원인 것과 비교했을 때 저렴한 편이다.

또한 한국은 ‘페이퍼백(종이 책 표지)’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아 중간 성격의 단행본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표지와 컬러 인쇄로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즉 좋은 품질의 책을 페이퍼백 가격으로 저렴하게 내놓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책값이 비싸지도 않을뿐더러 좋은 품질의 책을 오히려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책값’을 두고 고심하기 보다는 다른 마케팅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값을 800원 단위로 끊어서 판매해 소비자들이 비교적 저렴하다고 느끼게 하는 ‘단수 가격’전략이나, 대부분의 온라인 서점에서 행해지는 ‘무료배송·할인판매’를 통한 악순환 반복보다는 저자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거나, 책을 사면 덤으로 주는 굿즈(goods) 등을 활용한 마케팅을 실시하는 것이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문학을 두고 노골적인 마케팅 하는 행태가 사라지는 날이 하루 빨리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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