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고은 시인의 『어느 날』의 첫 인상은 마치 하루하루 소셜미디어에 제목 없이 짤막하게 남겨지는 누군가의 글들을 보는 것 같았다. 시집에 수록된 217개의 시 제목이 모두 ‘어느 날’이다. 시인에게 ‘어느 날’ 찾아온 사념들과 감성들을 담은 책, 그래서 진솔하게 다가오는 시집이 여기 있다.
산 엄친(嚴親)도
죽어 자친(慈親)이 되고 만다
추석 지나
아버지 무덤에 가
나도 누구의 아들이었다
시인이 80번째 ‘어느 날’에 남긴 시 한 편이다.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느낀 사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산 엄친은 죽어 자친이 된다. 시인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돼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다.
혹자는 이러한 시인의 시에 담긴 ‘허무’를 보고 고은을 허무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고은은 “(내 시는) 유럽의 허무주의나 노장사상의 허무같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삶에서 그냥 무(無)와 만난 거지요. 같이 뛰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고,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는 것”이라 말했다.
천국이란 것 뭐야
지옥이란 것 뭐야
다 이 세상에 있는 것
155번째 ‘어느 날’에서 시인은 '세상에는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고 말한다. 이제 '희망'과 '허무'는 병존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허무' 속에서 '희망'을 찾는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 '허무'를 딛고 일어난다.
고은은 인터뷰에서 삶이 죽음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허무'를 딛지 않고서는 '희망'의 구체성이 없다면서 "우리의 모든 힘, 이상, 꿈, 희망은 반대쪽의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통절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 멋져
임마누엘
임마누엘 칸트 멋져
처음에는 이성
다음에는 도덕
마지막에는 미(美)와 숭고(崇古)
하늘을 우러러
소경으로 읊고 싶어라 눈 감은 꾀고리로 울고 싶어라
‘하늘을 우러러 소경으로 읊고 싶어라’, ‘눈 감은 꾀꼬리로 울고 싶어라’는 행에는 시인이 추구하는 ‘허무를 딛고 희망을 찾는다’는 삶의 자세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고은 지음│발견 펴냄│260쪽│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