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멀크러시’에 빠진 2030세대… 성공보단 행복
‘노멀크러시’에 빠진 2030세대… 성공보단 행복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1.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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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노멀크러시’는 Normal(보통의)+Crush(반하다)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에 질린 20대가 보통의 존재에 눈을 돌리게 된 현상을 설명하는 신조어다. 그동안 “보통이야”라는 말은 칭찬과 거리가 영 멀었다. 평범하다는 것은 매력적인 것과 상반되는 뜻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가치가 역전됐다. 요즘 2030세대들은 ‘소소한 보통의 존재’ 매력에 흠뻑 빠졌다.

큰돈 보다는 충분한 여가 원해

2030세대들이 ‘헬조선’이라고 사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자기 계발서와 토익, 자격증 책을 쉽사리 손에서 놓을 수 없던 이유는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화려한 성공은 ‘나의 것'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지독한 경쟁에 질린 20대가 밋밋하고 편안한, 보통의 정서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가 지난해 12월 21일부터 지난 2일까지 20~35세 성인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3명은 큰돈을 벌지 못해도 충분한 여가를 갖고 교우관계, 여행·레저, 취미 등을 즐기는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가 시간을 원하는 경향은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큰 트렌드 중 하나가 ‘워라벨(Work-life Balance)’이다. ‘워라벨’이란 일에만 치중하지 말고, 일과 생활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워라벨을 원한다. 또한 LG 계열 광고회사 HS애드가 ‘워라벨’ ‘가심비’ 등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 SNS 등을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언급되고 있는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워라벨은 2016년부터 SNS상에서 등장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폭증하는 추이를 보였다. 한편 지난해는 경기 불황과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가성비가 선택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됐지만, 올해부터는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가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가심비는 가격 대 마음 비율을 의미하며, 가격 대비 소비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음의 만족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피곤한 세상, 편안함 찾아

노멀크러시는 2030세대의 삶을 대표한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파자마 같은 셔츠가 유행하고, 익선동이나 망원동처럼 조용한 동네가 떠오르고 있다. 또한 공통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유명인의 성공담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감을 얻는다.

tvN에서 방영하는 <혼술남녀>는 타 인기 드라마들처럼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도, 자극적인 스토리 전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는 시청률 5.8%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짠내’나는 현실 청춘들의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통계청에 따르면, 취업준비생 65만 명 중 40%인 26만 명이 공무원 준비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벌 2세와의 연애가 담긴 신데렐라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강남·명동 비켜, 성수동·망원동 등 핫플레이스

요즘 2030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소는 빌딩 숲 강남도, 북적거리는 명동도 아니다. 지난해 SNS에서 핫한 장소는 성수동, 망원동, 익선동 그리고 샤로수길로,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게시물 수가 14만 개부터 48만 개까지 어마어마하다.

이 골목들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한 동네 책방도 덩달아 핫 플레이스가 됐다. 의류공장을 개조한 <이곶>은 성수동에, 옛날 만화방을 연상시키는 <만홧가게>는 익선동에, 추천 입고 방식을 선보이는 <어쩌다 책방>은 망원동에, 그리고 여행 관련 도서를 소개하는 <살롱드북>은 샤로수길에 위치해 있으며, 최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주인 취향이 그대로 묻어 난 책방과 독립출판물을 보는 것을 소소한 재미로 느끼기 때문이다.

테라피스트로 근무하고 있는 권 씨(27)는 "대학 때는 화려하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했지만 요즘은 조용하고 평온해지는 곳을 찾게 된다. 사회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슬라임, 의미 없다고? 나만의 휴식법이야”

2030세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에도 관심을 쏟고, 시간을 투자한다. 대표적인 예가 액체 괴물, 일명 슬라임이다. 끈적이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의 장난감을 주물럭거리면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 2030세대의 새로운 휴식 방법이 됐다.

유튜브에 ‘슬라임’을 검색하면 나오는 동영상이 1일 기준 2,050만 개가 넘는다. 지난해 6월, 유튜브 채널 <Kaya ASMR>이 제작한 ‘묘하게 만족스러운 슬라임들’ 영상이 163만 조회 수를 올렸고, 지난해 7월 유튜버 ‘츄팝’이 업로드한 슬라임 제작 영상이 조회 수 318만을 기록했다. 또한 지마켓, 11번가, 텐바이텐 등 온라인 유통채널에서 슬라임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물론 직접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슬라임은 2015년 유튜브의 인기 어린이 채널 <Carrie And Toys>에서 처음 소개돼 2,3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한 바 있으며, 지난해 6월 아이유가 본인의 SNS에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영상을 올린 후로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작년에는 슬라임만 유통하는 사이트 ‘슬라임코리아’도 생겼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최근 대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슬라임이 인기를 얻은 것으로 분석했다. 지난해 4월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의 ‘2017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느끼는 학교생활에 대한 스트레스가 중·고등학생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20~24세의 학교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인지율은 57.7%로, 13~19세 50.5%보다 무려 7.2% 높았다.

이상규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드럽고 푹신한 촉감의 일명 ‘애착 인형’, ‘애착 이불’ 등을 만지며 편안함을 갖는 것처럼, 대학생들도 이 같은 이유로 슬라임을 만지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듯하다”며 “그만큼 요즘 대학생들이 취업·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잠깐의 유행 아닌 ‘노멀크러시’ 열풍

2030세대들은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처럼 편안하고 소박한 정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아도 바쁜 일상 속 지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올해의 트렌드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꼽았듯, 평범함을 향한 열망이 확산되고 있다. ‘소확행’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쓴 신조어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 먹거나,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행복이 인생을 진정 값지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히 과소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것을 촉구하는 개념으로 노멀크러시와 일맥상통한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지난해 8월 JTBC <한끼줍쇼>에 출연한 가수 이효리가 초등생 소녀에게 던진 이 말은 2030세대들에게 열광적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온라인과 SNS에서는 이 말에 대해 “말할 수 없이 해방감을 느꼈다”, “눈물 나게 좋은 말” 같은 반응이 일었다. ‘아무나가 되어 평범하게 사는 삶도 훌륭한 삶‘이라는 노멀크러시에 대해 젊은 세대가 집단으로 동의를 표시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20-39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몰입하기보다 현재의 일상과 여유에 더 집중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응답자 78%가 ‘그렇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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