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배급사에 치여 빛 못 보는 ‘숨은 진주’
거대 배급사에 치여 빛 못 보는 ‘숨은 진주’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1.0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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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멀티플렉스, 영화 상영 기회는 물론 영화 볼 권리까지 빼앗아...

[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지난해 12월 20일 개봉한 <신과함께-죄와 벌>이 새해 첫 1,000만을 돌파한 반면 한 주 앞서 개봉돼 선전하던 <강철비>는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그쳤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신과함께>를 비롯해 CJ엔터테인먼트가 내놓은 <1987> 등 멀티플렉스를 확보하고 있는 배급사의 작품들이 연이어 스크린에 걸리면서 <강철비>가 상영관을 빼앗겨 교차 상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대작 개봉으로 상영관을 빼앗기는 건 흔한 일이지만 <강철비>의 경우, 교차 상영에 들어간 시점이 빠른 편이라 논란이 일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강철비>는 지난해 12월 14일 개봉 후 꾸준히 5,000~6,000회 정도로 상영 횟수를 유지했지만, 20일에 3,643회로 급감하더니 27일부터 새해 초까지는 1,500회까지 주저앉았다. 20일에 <신과함께>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강철비>는 상영관 수가 반으로 줄고, 상영시간 마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밤에 배치돼 관객과 만날 기회를 빼앗겼다. 실제로 지난 5일 CGV(강남) 시간표를 보면, 11시 20분과 22시 2회 상영했으며 롯데시네마(에비뉴엘-명동) 역시 11시 25분과 22시 40분으로 확인됐다. 반면 <신과함께>는 무려 1,900여개가 넘는 스크린을 차지하고 독주했다.

한편 <강철비>에 출연한 배우 박은혜가 상영관 수가 줄어드는 현실에 대한 강한 아쉬움을 피력했다. 박은혜는 지난해 12월 31일 자신의 SNS에 강철비가 교차 상영하는 극장 시간표를 캡처해 올리며 “주말에 강철비 보라는 겁니까? 400만 못 가게 하려고 작정한 걸까. 거의 모든 극장에서 인기 많은 영화 시간대를 이렇게 주는 이유가 뭘까요”라며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이어 ‘#독과점’ ‘#극장의 갑질’ ‘#모든 영화인에게 닥칠 수 있는 악몽 같은 일’ ‘#더 심해지기 전에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인생이 이렇지’, ‘#영화도 현실인 현실’ 등의 해시태그를 덧붙였다.

한국 영화계의 현실 ‘스크린 독과점’

<강철비>외에도 거대 배급사에 관객과 만날 기회를 빼앗긴 경우는 이전부터 빈번했다. <어우동 : 주인 없는 꽃>이 대표적인 예이다. 개봉 일을 2번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관을 배정 받지 못해 논란이 야기된 바 있다.

<어우동 : 주인 없는 꽃>은 지난 2015년 전국 10개관에서 개봉했지만 CGV, 롯데시네마에서는 개봉관을 단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 매주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을 앞둔 가운데 대형 배급사에서 맡은 영화들은 개봉한 지 몇 주가 지나도 꾸준히 상영관을 확보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반면 예산이 적은 영화나 흥행 배우가 나오지 않는 영화들은 개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영 시간표에서 사라지거나 아예 관객들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재 한국 영화계의 현실이다. 영화에 대한 관람 의사를 표출했던 관객들의 관람 권리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감독에게도 박탈감을 안긴다.

영화, ‘상품’ 아닌 ‘문화’

지난해 9월, 국내 스크린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3대 멀티플렉스가 자사 극장에서 <옥자> 상영을 불허해 논란이 일었다. 영화가 소비되는 각 창구마다 지켜지는 일종의 공개 순서인 ‘홀드 백(hold back)’을 문제 삼아 상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홀드 백은 한 편의 영화가 다른 수익과정으로 중심을 이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멀티플렉스는 최소 3주간의 홀드 백을 요구하지만, <옥자>에 전액 투자한 넷플릭스는 동시 개봉을 원칙으로 한다.

‘홀드백’은 인터넷 등 IT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철저하게 지켜졌던 시장의 규율이었지만 최근 영화의 유통 순서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옥자> 상영 불허 결정은 영화를 ‘상품’이라는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 문제가 됐다. 영화는 경제적 효용도 중요하지만, 사회 문화적 가치가 더욱 중요한 ‘문화 상품’이다.

3대 멀티플렉스가 이러한 ‘갑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배급과 상영을 통합한 이른바 ‘수직계열화’된 거대 미디어그룹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화 제작자들은 영화를 상영할 권리를 박탈당해 관객들은 영화를 볼 권리를 잃는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연출자이며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이런 감독의 작품조차 개봉관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대다수 한국 영화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잘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영화 수익 중 극장 수입이 70%가 넘기 때문에 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투자배급사들의 독과점이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따라서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배급과 상영을 손에 쥐고 있는 투자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독립영화, ‘상영’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 절실

3대 멀티플렉스의 <옥자> 상영 불허는 이윽고 저예산 독립영화들의 상영 기회마저 빼앗았다. 성주 사드 배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는 지난해 6월 60여 곳의 극장에서 개봉됐지만 1주일 후 결국 극장 상영 중지 결정을 내렸다. <옥자>가 3대 멀티플렉스 극장의 보이콧 여파로 상업영화관 및 독립·예술영화관 103곳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파란나비효과>의 영화 배급사 ㈜인디플러그 측은 "고심 끝에 극장 대신 '공동체 및 대관 상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거대 배급사의 규제와 동시에 독립영화정책이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지난해 7월 12일 독립영화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독과점 규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감정의 시대 :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의 김숙현 감독, <24>의 명소희 감독, <5월의 봄>의 박홍준 인디포럼 의장, <파티51>의 정용택 감독 그리고 <경계도시>의 홍형숙 감독이 참석했다.

정용택 감독은 “배급과 상영 분리는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독립영화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CGV 아트하우스의 독립영화 배급도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단관 예술관 등에서 <옥자>를 배급하면서 독립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 하는 일만 해도 그렇다”라고 말했다. 

한편 “산업적 욕망에 따라 각자의 선택지가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건 제작지원제도만이 아니다. 배급제도도 마찬가지다. 멀티플렉스마다 한 관 정도는 독립영화전용관으로 만든다든지 독립영화전용관, 예술영화전용관 등에서 한 작품의 최소 상영일수를 보장하는 등보다 세심하고 현실적인 방안이 따라야 한다”며 의견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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