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바로 알기] (4) 일본을 알고 중국을 제어하고 미국에겐 이득 취하는 혜안을 가진 신숙주 ‘내수(內修)외교’가 요즘 특히 절실하다
[신숙주 바로 알기] (4) 일본을 알고 중국을 제어하고 미국에겐 이득 취하는 혜안을 가진 신숙주 ‘내수(內修)외교’가 요즘 특히 절실하다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1.2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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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어학자” “세종·세조 연간에 우뚝 솟은 시인” “조선 전기 최고의 외교전문가” 등은 신숙주를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신숙주의 외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국을 본다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외교를 펼치고 있는 우리로서는 특히 신숙주가 주창한 내수(內修)외교를 본받을만 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신숙주 탄생 600돌 기념 학술대회(10월 27일)에서 발표된 박현모 교수(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의 '신숙주의 내수(內修)외교에서 배울 점'를 요약한 것이다.

신숙주의 외교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이예(李藝, 1373∼1445)와 더불어 15세기 조선 외교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특히 복잡하고 위험한 일본과의 관계를 풀어간 전문 외교관인데, 생몰 연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예는 15세기 전반부를, 신숙주는 후반부를 이끌어간 대표 인물이다.

이예가 1400년부터 1443년까지 무려 40차례가 넘게, 거의 매년 한 차례씩 현해탄을 건너가 667명의 포로를 송환해 온 것처럼(세종실록 27/2/23, 이예 졸기), 신숙주는 16차례 가량 일본과 명나라와 여진족 거주 지역을 오가며 외교와 전쟁의 임무를 수행했다.

신숙주의 외교는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즉 그는 20대 후반과 30대 전반의 나이에는 일본과 명나라 지역을 다녔고, 40대 중반의 나이에는 두만강 변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주로 활약했다. 그는 27세 때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29세 때는 어학 연구자로 요동지역에 갔는데, 즉석에서 수준 높은 시를 짓거나 뛰어난 음운학 실력을 발휘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특히 당시 요동에 망명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신숙주와의 대화 이후 ? 결코 쉽지 않았을 - 훈민정음에 대해 음운학적 자문을 해줄 뿐만 아니라, ‘진실로 어진 사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실로 오랜만에 만났다’는 글까지 준 것은 신숙주의 ‘인문외교’, 즉 높은 지적 교류를 통해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외교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1450년(세종32년)에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에 와서 조선 지식들의 수준을 떠보려 할 때,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시사(詩詞) 구사능력으로 그를 탄복시킨 일 역시 ‘인문외교’를 통해 국격(國格)을 높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외교정책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정성[誠]으로 사대하고,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신뢰[信]로 교린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추진되었는데, 극진한 대명(對明) 사대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소1만 마리 매매 요구’ 등 명나라의 과도한 요구에 대해서도 ‘국가의 안위에 관계될’ 정도가 아니면 최대한의 성의로 수용했다. 그렇게 해서 다져진 양국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북방영토 개척, 특히 파저강토벌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1450년에 조선에 온 명나라의 사신 예겸은 정인지?성삼문?신숙주와 더불어 시와 운을 주고받으며 “창화(倡和, 한쪽이 부르면 곧 다른 쪽이 화답하여 부름)하기에 빈 날이 없었다”고 했다(세종실록 32/윤1/3). 예겸은 신숙주 등에게 “그대와 하룻밤 말하는 것이 10년 동안 글 읽는 것보다 낫소”(32/윤1/8)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문외교’의 효과 때문인지, 중국에서 온 사신이 환관이 아닌 사대부 출신일 경우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경서의 담론을 나눌 때, 조선의 군신들이 존경하며 그들의 언행을 책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즉 세종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의 미담을 기록하여 편찬한 ≪황화집≫은 양국 간의 지식 및 인문외교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창제 과정에서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성상문과 신숙주 등에게 폭넓게 어문학 지식을 자문해준 것도 그런 신뢰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숙주가 세종이나 세조의 명을 따라 일본과 여진족 외교를 한 것은  ‘신뢰에 기반한 교린’이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신숙주의 경우는 다른 외교 인물들과 달리 <해동제국기>를 집필하고, 거기에 자신의 외교철학을 서술한 점이 특이한데, 그는 일본이나 여진족을 대하는 외교의 요체로 ‘내수(內修)’를 들었다.

즉 오랑캐를 대하는 방도는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안을 잘 정돈하는데 있고, 변방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을 잘 이끄는데 있으며, 군대를 튼튼히 하는데 있지 않고 기강을 잘 세우는데 있다[待夷狄之道 不在乎外樣 而在乎內修, 不在乎邊禦 而在乎朝廷 不在乎兵革 而在乎紀綱]”는 말이 그것이다.

군사력에 기반한 대외 정벌[外征]이 아니라 국가 기강을 다지고 조정을 잘 통솔하는 것에서 외교 능력이 생긴다는 이 말은 현대의 외교정책 이론과도 부합된다. 즉 뛰어난 외교관은 자국의 국력 요소들 중 사용 가능한 것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인데, 사용 가능한 국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부의 질(quality of government)”이다.

‘정부의 질’은 특정 외교정책에 대한 초당적 협력과 함께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는 ‘유연한 힘(soft power)’인데, 이는 국방력이나 경제력 또는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경직된 힘(hard power)’보다 외교력을 결정하는데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일본과의 화친을 중시한 외교관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즉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성종에게 “원하옵건대 일본과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잊지 마소서[願國家毋與日本失和]”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계기로 일본과의 외교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어떤 경험을 했을까?

1443년 일본 통신사로서 신숙주의 활동은 크게 1) 사명에 대한 헌신과 인문외교, 2) 대마도주를 설득하는 그의 능력, 그리고 3) 일본에 오가는 중에 보인 태연함 등이 이야기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게 대화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능력이다. 신숙주 일행이 돌아올 무렵 대마도주는 조선에서 주는 세견선의 수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신숙주는 이해 관계를 들어 그를 설득했다.

신숙주는 아랫사람들에 오도(誤導)되어 결정짓지 못하는[依違] 그에게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갈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배의 수를 정하지 않으면 아래 사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것인데, 도주에게 의뢰할 것이 뭐 있겠느냐”고 대마도주를 납득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그는 세견선 조항에 약조했다.

신숙주의 내수 외교는 여진 부족을 화해시키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화해 임무는 여진 부족들의 “자중상도(自中相圖)”, 즉 자기들끼리 죽이고 보복하는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상호 간 지나친 보복 전투로 조선 변방 백성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들끼리 단합하여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내버려 두어도 안 되는 미묘한 상황에서, 적절히 중재하는 게 그가 맡은 임무의 성격이었다.

신숙주는 43세가 되는 1459년(세조5년)에 두만강변의 6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여진 부족을 화해시켰는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곳곳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알현하는데, 수백 명씩 떼를 이루는데”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使彼心感]”는 기록이 그것이다(세조실록 5/3/10). 이는 태종과 세종이 추진했던 ‘은위 병용 외교’ 복원방침을 신숙주가 저들에게 충분히 알렸고 또 그것이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렵고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숙주는 어떻게 사피심감(使彼心感), 즉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외교를 펼쳤나?

포용과 위협을 동시 구사하는 화법이다. 신숙주는 여진 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세조의 포용정책을 알렸다. 우선 그는 “우리 성상(聖上)께서 신무(神武)하시어 화란을 평정하고서 […] 풍속이 다른[異俗] 여러 종족들까지도 한결같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이 대하고 있다”면서, 서로 사로잡은 자를 돌려주고 각각 전의 원한을 떨쳐 버리고 화해하라고 설득했다.

이어서 그는 “만약 (화해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무례하게 항거하면 […] 내가 지금 명을 받들고 와서 방비를 정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끝마쳤다”면서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으로 달래서 보살피는 뜻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 위협하여 두렵게 하는[一以示憐撫之意 一以恐動之]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말과 함께 글로 의사소통을 한 결과, 여진 부족들은 화해 장소에서 저희끼리 서로 “상위(上位)께서 우리들을 위하시는 계책은 비록 아비가 자식을 연휼(憐恤)하더라도 또한 이보다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신숙주의 화해책을 수용했다

신숙주는 인문외교를 통해서 일본에서 조선의 국격을 높였다. 만주 지역에서는 글을 통해, 또는 무력 사용의 위협으로 여진 부족으로 하여금 조선 정부의 방침을 따르게 만들었다[遠達四夷]. ‘시 300편을 외운 내공에 힘입어 능히 외교적 난제를 해결한’ 인재가 곧 신숙주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담당했던[臣死敢辭 將行]’ 사명감 투철한 관료였고(<보한재집> 부록 ‘문충공행장’[강희맹]), 외교 현장에 나아가서는 상대방 수준에 맞는 수단을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협상가였다.

말하자면 신숙주의 헌신적인 외교 노력으로 조선 정부는 만주 일대의 질서유지 국가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한편, 일본과는 교린관계, 즉 대마도주에게 재량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조·일 통교체제를 정비해 동북아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숙주의 외교활동은 세종의 신뢰 기반 교린 원칙-동북아의 질서 유지에 협조하는 세력에게는 은혜를 베풀되, 도발 세력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확실히 제압하는-을 복원시켰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면 신숙주의 외교사상, 특히 ‘내수(內修)론’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외교는 한마디로 외양(外樣)은 화려하나 내수(內修)가 극히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한때 유엔 비상임이사국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 우쭐하기도 했다. OECD 회원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 그리고 대중문화에서의 한류 바람 등도 우리의 외양을 화려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및 북한 미사일 발사 등 핵심적인 국가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거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세월호 사건’이나 ‘대통령 탄핵 사건’ 등으로 국격이 급격히 추락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장기적인 외교전략이나 뛰어난 외교인물의 부재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신숙주가 말한 내수외교론, 즉 외교 인재의 적극적인 양성과 적재적소의 배치를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세종시대의 외교 인물인 박안신은 “7년 묵은 중병을 치료하려면 지금이라도 당장 3년 묵은 쑥[三年之艾]을 준비해야”(세종실록 12/4/13) 한다고 했는데, ‘3년 묵은 쑥’으로 비유되는 외교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무(急務)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중국과 일본과 미국을 아는 ‘외교인재 300 프로젝트’를 제안한 바 있거니와, 지금이라도 젊은 인재를 선발해 국비 장학생으로 이들 국가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국제정세의 세력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여 새롭게 부상하는 패권국과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 아울러 주변국과의 신뢰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숙주가 말한 내수외교의 힘, 즉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내부 소통을 극대화해서 우리의 외교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부 조직과 여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

일본을 깊숙이 알고[備?日本] 중국의 자의적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으며[制御中國],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專對美國] 신숙주 같은 외교 인물을 찾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 시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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