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눈 오는 날
엄 정 권
피난민 판잣집 남루한 이마를 맞대고
이집 저집 담벼락은
야금야금 떠밀려서
골목은 삿대질 속에 좁아졌다
낮에는 부녀자들 주둥이가 부딪치고
밤이면 아재들 술잔이 부딪쳤다
동네 공터는 소문이 끓고 넘치고
보란 듯 갠 날씨처럼 말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날도 노을빛 보다 먼저
애들이 하나둘 집으로 불려가고
한 점 남은 햇살 조각마저
허둥지둥 자리를 뜬다
눈썹에 지평선이 걸리고
청회색 구름이 공터를 배회하고
판잣집들은 낮은 포복으로 밤길을 기어가는데
문득, 하늘이 열리고 차가운 별 하나 내려온다
저작권자 © 독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