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사학자 정형진 “상고사 연구는 한민족 정체성 회복의 길…담론 잃은 세대, 공동체 역사의식 부족”
재야사학자 정형진 “상고사 연구는 한민족 정체성 회복의 길…담론 잃은 세대, 공동체 역사의식 부족”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1.2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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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上古史). “아득한 날 하늘이 열리고 산이 솟고 땅이 평평해지고 바람이 충만한 가운데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라고 하는 아주 먼 옛이야기. 단군 이야기, 전설인지 신화인지 모를 경계에서 사실을 찾고자 역사의 파편을 뒤진다.
암각화에서 한 획을 찾기 위해 눈비 맞으며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설화에서 역사의 실뿌리 하나 건지려고 바스러지는 책의 퀴퀴한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파편을 모으니 그림 한 조각이 드러나고 그 조각을 잇대고 따라가니 역사의 줄기를 만난다.

박제된 역사가 비로소 숨을 쉰다. 그의 앞에서 우두둑 뼈마디 꺾어지는 소리를 내며 역사가 기지개를 켠다. 그 숨에 코를 벌름거리고 그 기지개에 어깨를 같이 펴는 이가 정형진이다. 재야 역사학자로 불린다.

정형진

그는 상고사를 교류와 흐름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멕시코에 살았던 인디언들이 한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한 서적이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무릎을 맞대고 앉자마자 거대담론과 공동체 이야기를 꺼냈다. 상고사와 어떤 관계가 있나. “1980년대 후 우리 사회에 큰 주제, 즉 거대담론이 없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생존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공동체 변화나 발전에 대한 관심은 많이 줄어 들었죠” 국가와 공동체, 세계 변혁 등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야 역사 얘기도 나오는데, 이 줄기가 단절됐다는 설명이다.

길게 말했지만 요지는 이렇다. “거대담론이 있어야 한다. 통일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안타깝다” 덧붙이면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의식하지 않고 개인만 의식하면 공동체가 붕괴된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고민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에게 온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 전 『문화로 읽어낸 우리 고대사』 를 펴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문화로 읽어낸 우리 고대사』      
정형진 지음 | 휘즈북스 펴냄 | 336쪽 | 16,000원

그는 1985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3년인가 일 좀 하다 포기하고 90년 경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30년 동안 월급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그 절반 넘는 세월을 독서와 답사 그리고 명상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상고사 정립을 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장기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커다란 맹점이 되겠다 싶어 상고사에 매달리게 된다.

재야 사학자 정형진은 기자에게 우리 상고사를 조금이나마 이해시키기 위해 신라의 여우 토템(신앙)을 설명했다. 경주에 ‘여우바위’ 또는 ‘여시바위’라고 불리는 고인돌뚜껑돌이 있다. 여기 새겨진 암각화에 여우가 있다. 이를 미뤄 여우 토템을 추정하는데, 원광법사가 있던 절의 산신이 여우였다. 여우신이 원광법사와 영적 대화도 나눈다. 서라벌 지역에 여우 토템이 있었다는 게 추측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에 이런 여우귀신 여우무당 코드가 여럿 들어 있다. 그런데 이러 여우 토템이 중국 요서지역에도 있고 황해도에도 구전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일본 신사(神祀)에도 있다. 역사를 교류와 흐름의 문화적 코드로 본다면 여우 토템은 한반도를 서북에서 동남으로 대각선으로 해 일본까지 갔다는 말이다. 문화는 그렇게 흘러갔다는 말이다.

그러면 페르시아인들이 경주에 지금의 중국인처럼 많았다는 게 사실인가. 신라시대 토기에 등장하는 코 큰 사람이 바로 페르시아 사람들이란 말인가. 정형진은 그렇다고 한다.

“아랍 쪽 책을 보면 신라를 이상향으로 소개한 게 많아요. 서라벌에 가면 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서라벌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했어요. 아랍인들이 서라벌에 오면 아예 결혼하고 눌러 앉는 일이 많았던 거죠” 그의 설명을 빌면 서라벌 거리는 외국인으로 넘쳐났고 세계 5대 도시에 들 정도의 위상이었다. 중국 장안(長安), 바그다드, 이스탄불,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형진이 말하는 서라벌의 풍경은 상상을 뛰어 넘는다. 기와집 처마로 다니면 남산까지 비를 안 맞을 정도였으며 기와집은 처마가 지금의 울산까지 연결되는 장관을 이루었고 집집마다 나무를 안 때고 모두 숯을 써 밥을 해먹었다는 것. 이게 1300년 전 경주의 모습이다.
 
역사의 흐름은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른다, 이 에너지축이 신라를 건너 일본까지 흐른 것이다. 

역사에 가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일부에선 고구려 통일론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 정형진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렇게 됐다면 지금쯤 우리는 한국어를 쓸까요, 중국어를 쓸까요?” 무슨 말인가? 이게.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도 아마 중국 정권에게 무너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은 500년 주기로 권력이 바뀌는데, 아마 고구려는 중국에게 당했을 겁니다. 지금쯤 시진핑 지배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신라가 통일한 것은 결과론적이지만 한민족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고 독자적인 문화 방어 측면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정형진은 역사인식의 균형잡기를 강조한다.

그는 한반도를 역사 문화의 자루라고 했다. 중국이든 시베리아든 다 한반도로 문명이 흘러오는 등 유라시아문화가 자루에 담겨 섞이고 다시 태어나고 진화했다는 설명이다. 우리의 정신적 연원이 여기 있어 초기 민족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고 정형진은 말한다.

경주 원성왕릉(괘릉)의 무인상. 서역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 무인상의 모델은 누구인가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근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책 54쪽>

그 문화 코드가 삼국유사에 담겨 있다. 부산KBS 시민대학에서 삼국유사를 총 80시간 강의했지만 턱없이 모자란다. 삼국유사는 그 깊이가 바닥을 몰라 비밀을 찾아가는 탐험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경주를 직장 삼아 땅바닥을 뒤지고 돌 한 무더기 예사로 보지 않았으며 중국을 드나들면서는 설화 한 토막 허투루 듣지 않았다. 30년 동안 월급 한 푼 받은 적 없는 그의 사학(史學)은 결코 허공에 있지 않았다. 사료(史料)는 지금도 그의 손길과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풍성한 턱수염은 도인의 풍모를 흉내 낸 것이 아닌 것 같다. 힘주어 말할 때마다 몇 가닥 서릿발 같은 흰 수염이 떨렸다. / 엄정권·정연심 기자, 사진=이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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