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바로 알기] (3) 통신사들의 필독서이자 일본인들의 ‘500년 교본’ 신숙주 『해동제국기』
[신숙주 바로 알기] (3) 통신사들의 필독서이자 일본인들의 ‘500년 교본’ 신숙주 『해동제국기』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1.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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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가 세종의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내면서 반포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 음운학자로서의 역할은 매우 지대하다. 또한 신숙주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지은 『해동제국기』는 조선시대에 지은 해외문견록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해동제국기』만이 금속활자로 펴낸 것은 국가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실례라 할 만하다.

『해동제국기』는 조선통신사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고 일본에서는 신숙주의 시를 읽었고 새까맣게 주석을 달아 읽을 정도로 조선을 이해하는 중요한 교본 노릇을 했다.

다음은 신숙주 탄생 600돌 기념 학술대회(10월 27일)에서 발표된 허경진 연세대 교수의 ‘조선통신사와 『해동제국기』’를 요약한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조선과 명나라가 서로 쇄국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에 중국인이 살 수 없었다. 중국어 회화를 조선인 역관에게서 종이책으로 배워야 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도 중국인 학자 황찬(黃瓚)의 자문을 받기 위해 신숙주가 요동에 13회나 다녀와야 했다. 황찬은 신숙주의 학자적인 태도에 감복하여 희현당(希賢堂)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글까지 썼다.

 쇄국주의 시대일수록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공식적인 사신만이 외국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사신으로 방문하는 기회에 해외문견록을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오백년 동안 1,000회가 넘는 사신을 중국에 파견했고 100회가 넘는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지만, 두고두고 읽을만한 해외문견록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외문견록으로는 삼국시대에 혜초(慧超)가 기록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조선전기에 신숙주가 기록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선후기에 박지원이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 대한제국 시대에 유길준이 기록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꼽을 수 있다.

필자는 이 가운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열하일기(熱河日記)≫,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모두 번역했는데, 후대에 가장 오랫 동안 영향을 끼친 해외문견록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되던 1607년(제1차)부터 1811년(제12차)까지 사행원들이 손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들고 다니며 참고하였고, 일본인들도 여전히 신숙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왕오천축국전≫이나 ≪열하일기≫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졌지만, ≪해동제국기≫만은 조선시대에 이미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된 것도 국가 차원의 중요성 때문이다.    

후대에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한 통신사는 변효문(卞孝文)으로 종사관 신숙주와 함께 파견되어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였다.

세견선(歲遣船)의 숫자와 체류기간, 접대방법, 어세(漁稅) 납부 등을 자세하게 명문화시켜 두 나라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그런데 후대인들은 계해약조의 공을 정사 변효문에게 돌리지 않고, 종사관 신숙주에게 돌렸다.

10차(1748) 통신사 종사관 조명채가 “우리나라의 통신사(通信使)는 정통(正統) 계해년(1443)에 우리 세종조(世宗朝)에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낸 뒤로부터 신등(臣等)에게 이르기까지 13차이다. -≪봉사일본시문견록≫ 총론을 마무리하면서” 라고 서술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조명채는 정사 변효문을 언급하지 않고, ‘통신사는 신숙주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언한 것이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일본국기(日本國紀)」, 「류큐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의 3부로 구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신숙주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 기록한 부분은 「일본국기」의 「8도 66주(八道六十六州)」와 「조빙응접기」 29개 항목이다.

해마다 수없이 방문하는 사신들이 일본에 실제로 있는 국가, 또는 지역의 사신들인지, 실제 있는 지역이라면 얼마나 큰 지역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거추(巨酋)와 제추(諸酋)로 나누어 소개했으며, 그들이 보낸 사신을 어떤 등급으로 어떻게 접대할 것인지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들의 접대가 외교뿐만 아니라 국방과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항목별 기사체로 ≪해동제국기≫를 쓴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통신사 요청과 파견이 재개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明, 淸)과 일본(에도막부)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되어, 한자문화권에서 고립된 일본이 조선을 통해 대륙문화를 전수받아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도막부는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면서 국서(國書)를 전달하는 삼사(三使) 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통신사의 숙소마다 찾아와 필담(筆談)을 요청했는데, 필자는 17-19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 170종을 수집, 번역하여 ≪조선후기 통신사 필담창화집 번역총서≫ 40권을 책임편집 출판하였다. 이들은 문학, 철학, 정치, 역사, 지리, 의학,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화두 가운데 하나가 ‘신숙주’이다.

고려시대에 포은주, 조선초기에 신숙주, 임진왜란 이후에 12차나 통신사가 파견되어 수많은 시인들이 필담 창화에 참여했지만, 일본 시인들의 기억에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신숙주였다. 8차 통신사(1711)의 숙소에 일본 시인 기노시타 기쿠탄(木下菊潭)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았는데, 기노시타 기쿠탄이 서(序)와 함께 지어 올린 시에 제술관(製述官) 이현이 차운하여 화답하자, 기노시타 기쿠탄이 다시 화답하였다.

기노시타 기쿠탄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아들인데,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를 섬기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통신사 사행원들과 여러 차례 만났으므로 조선 문인의 계보를 꿰뚫고 있었는데, 그가 조선의 시인을 칭찬할 때에 쓴 표현이 바로 ‘지금의 신숙주’였다.

통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에 그는 오언배율 50운(韻)의 장편시를 지어 이현을 전송했는데, 그 서문에서 “문장(文章)은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이고, 불후(不朽)한 성사(盛事)이다.”라고 이현의 문장을 칭찬하더니  이 구절에 정인지·신숙주·이색·이행·권근·서거정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대제학을 역임했거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았던 석학들이다.

그런데 시대순으로 손꼽은 것이 아니라, 그가 문장 대가라고 인식했던 순서대로 회상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문인보다 세종대왕 시대의 정인지·신숙주를 먼저 칭찬했으니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들을 먼저 손꼽은 것이다. ‘장원을 차지하고, 중시(重試)에 급제하며, 사명을 받들고 공을 세웠다’는 칭찬이 신숙주에게 적합할 뿐만 아니라, 고려말 최고의 시인인 목은 이색에게 ‘시집을 남겼다[留詩集]’거나 조선전기 최대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에게 ‘창수가 충분하다[唱酬充]’는 세 글자로 문학을 칭찬한 것과 비교하면 신숙주에게는 ≪해동제국기≫를 비롯해 다방면으로 칭찬했음을 알 수 있다. 

후대 통신사 사행원들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어렵거나 복잡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해동제국기≫를 찾아보았다.

12차 통신사 가운데 일본과 가장 마찰이 심했던 통신사가 1711년에 파견되었던 8차 통신사였는데, 6월 9일 부산에서 “쇼군(將軍)을 일본 국왕(日本國王)으로 칭하겠다.”는 통보를 급박하게 받았다. 쇼군을 천황의 신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집정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정치적인 시도였는데, 조선에서도 그 동안 묵인해온 사실이지만 갑자기 통보해온 것은 외교상 결례였다. 

 정사 조태억(趙泰億)과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사이에 의례 상의 갈등은 쓰시마에서부터 생겼다. 8월 1일에 도주(島主)가 편지를 보내 “임진년(1592) 이전 일본 사신이 내빙(來聘)할 때에 조정에서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며 곧 대문 밖에서 지송(祗送)하였으니, 지금 사행(使行) 역시 응당 뜰에 내려서 사자를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1636년, 1643년, 1655년, 1682년 사행록을 살펴보며 “대문 밖에 나가서 맞이한 적이 없었다.”고 항변하였다.

조선 사행은 9월 16일 오사카에 도착했는데, 사행을 환영하는 잔치에서 조선 사신이 에도막부의 사자를 대문 밖에서 맞으라는 일본 측의 요구와 당 아래에서 맞아도 된다는 조선측의 의견이 충돌되어 열흘이나 조율하였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를 성종에게 제출한 지 500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 외교관들은 여전히 ≪해동제국기≫를 조선 안내서로 활용하였다.

조선에서 새로운 문물을 견문하고 일본과 근대식 외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1876년에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파견했는데,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의 집에 초대받아 들렸던 김기수의 눈에 ≪해동제국기≫가 보였다.

모리야마 시게루는 당시 강화도조약 체결의 실무책임자였던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이었는데, 그가 신숙주의 통신일기, 즉 ≪해동제국기≫를 읽은 이유는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동제국기≫를 단순하게 읽은 것이 아니라 첨삭(添削)해 가면서 읽었기에, 마치 고본(藁本) 같다고 하였다. 아마도 누군가 일본에서 출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일본 도서관에 ≪해동제국기≫가 여러 군데 소장되어 있는데, 동양문고(東洋文庫)에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 1870-1953)의 장서인 폐원도서(幣原圖書)가 찍힌 전사본(轉寫本)이 있어 눈길을 끈다.

신숙주의 시와 ≪해동제국기≫의 가치는 일본에서 더 일찍 인식하였다. 통신사가 올 때마다 일본 시인들은 그의 시를 외워가며 창화(唱和)하였고, 19세기말 근대조약이 맺어지는 시점까지도 일본 외교관들은 ≪해동제국기≫에 새까맣게 주석을 달아가며 읽거나 교감하며 베꼈다.

조선이 신숙주의 유언을 기억하는 동안에는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깃들었지만, 망각하는 순간 평화는 깨어졌다. 계해약조(癸亥約條)는 1443년 당대에 유효한 외교정책이었지만, ≪해동제국기≫와 신숙주의 유언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외교정신이다.     

고령 신씨 문중에는 국제감각이 뛰어난 외교관이 많았다. 신숙주(1443, 종사관) 이래 신경기(1617, 군관), 신유(1643, 종사관), 신태해(1643, 자제군관, 역관) 등이 통신사 사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을 다녀오면서 기록한 연행록도 많으니, 조선 전기에 신종호(申宗濩)의 ≪신축관광록(辛丑觀光錄)≫(1481), ≪병진관광록(丙辰觀光錄)≫(1496)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도 신유(申濡)의 ≪심관록(瀋館錄)≫(1639), ≪연대록(燕臺錄)≫(1652), 신좌모(申佐模)의 ≪연사기행((燕?紀行)≫(1855) 등의 수많은 연행록(燕行錄)이 나왔지만, 필자의 논문 이외에는 학계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해동제국기≫ 한 권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다녀오면서 기록한 수많은 조천록이나 연행록, 통신사 사행록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모범적인 시인이자 외교관으로 일본에서 인정받았던 신숙주의 후손들이 선조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받았는지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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