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바로 알기] (1) 신숙주를 ‘변절자’로 만든 건 이광수·박종화의 소설이었다
[신숙주 바로 알기] (1) 신숙주를 ‘변절자’로 만든 건 이광수·박종화의 소설이었다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1.0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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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작가 이병주는 말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어느 역사적 사실이든 인물이든 이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이 과장되고 인물이 신성화하고 누대에 칭송이 끊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꼬투리 하나에 가문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빛나는 업적마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인걸은 폄훼되는 경우도 있다. 태양을 탓할 수도 없고 월광을 원망할 수도 없다. 

신숙주가 후자의 경우다. 신숙주(1417~1475)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보필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작에 크게 기여한 탁월한 성운학자다. 아울러 북방 육진 개척 등 외교적 노력도 평가받고 있으며 병서도 지은 전략가이자 문화 예술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요즘 말로 하면 ‘르네상스적 인재’였다. 호는 보한재(保閒齋)로 올해 탄생 600돌을 맞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신숙주에겐 ‘변절자’라는 매우 부정적인 꼬리표와 함께 변절을 상징하는 ‘숙주나물’까지 가세해 보한재의 업적은 빛을 잃고 있다.

먼저 ‘신숙주=변절자’는 어디서 나온 등식일까. 우선 이광수·박종화 등 한국 문단 초기 거목들의 왜곡이 큰 영향을 주었다. 신숙주를 변절자로 묘사한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가 중학국어 국정교과서에 실리면서 ‘신숙주=변절자’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고 그의 업적은 조명 받지 못했다.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 초상화

신숙주는 다른 집현전 학자들보다도 한글 반포·보급 작업에서 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박팽년·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썼고,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해 『홍무정운역훈』과 『동국정운』, 두 운서(韻書)의 편찬, 집필 작업을 주도했다. 신숙주는 23세 때인 세종 21년 대과인 문과에 급제, 조정에 출사한 이래 36년간 여러 관직을 거쳐 최고 벼슬인 영의정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하지만 신숙주에게는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섬겼다는 이유로 변절자 이미지가 남아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와 박종화의 소설 『목매이는 여자』에 흥미를 위해 사실을 왜곡한 야사(野史)가 담기면서 신숙주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증폭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단종애사』나 『목매이는 여자』 등의 작품이 실린 문집은 지금으로 치면 주말 연속극에 해당하였으므로 그 파급력이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1995년 ‘신숙주 평전’을 냈던 박덕규 교수(단국대 문예창작학과)는 두 소설이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의 후손 이기가 쓴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 등에 기초해 쓰였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송와잡설’은 신숙주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것을 이광수와 박종화가 문집에 실으면서 신숙주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조 없는 인사로 매도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신숙주의 부인 윤 씨가 남편이 절의를 지키지 못해 자살한 것이라는 뜬소문을 소설화한 것이 ‘송와잡설’이며 이를 바탕으로 ‘신숙주부인전’[과 근대 이광수의 『단종애사』,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매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왜곡되고 부정적으로 묘사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드라마였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야사,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

신숙주를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는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파천무≫ (KBS, 1990년~1990년), ≪한명회≫ (KBS, 1994년~1994년),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대왕 세종≫ (KBS, 2008년~2008년), ≪공주의 남자≫ (KBS, 2011년~2011년),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등이 있다.

아내 윤 씨가 자살했다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조작이요 신숙주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된 왜곡 같다. 훈민정음 연구가로 한글학회 연구위원인 김슬옹 세종학교육원 원장은  “신숙주의 변절에 실망한 아내 윤 씨가 남편을 꾸짖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면서 “단종 복위를 위한 사육신 사건으로 사육신이 처형된 시점은 1456년(세조 2년) 6월이었는데 그의 부인은 5개월쯤 전인 1456년 1월에 죽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왜곡된 야사”라고 밝혔다.

결정적으로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50년대와 60년대에 중학교 국정 국어교과서 지문으로 실리는 바람에 ‘신숙주=변절자’ 이미지는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다. 당시는 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모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던 시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베스트셀러를 내놓은 작가 김훈도 왜곡되고 편파적인 역사교육에 일침을 놓으면서 사육신의 예를 들었다.

김훈은 최근 SNS를 통해 “사육신은 충절을 지키다가 사형당해 만고에 존경받는 충신이 됐고 사육신 편이 아니었던 신숙주 등 많은 지식인은 세조에게 붙어서 벼슬을 받고, 여진을 몰아내고,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고, ‘경국대전’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등 조선 재건사업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이어 김훈은 “사육신 같은 신하들만 데리고서는 나라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만 가르치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상하기 쉬워 변절의 상징이 된 ‘숙주나물’은 또 어떤 연유인가.

김슬옹 원장은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설(異說)을 제시했다. 신숙주가 녹두나물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나물 이름을 숙주나물이라 부르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숙주나물의 어원과 관련, 김 원장은 신숙주의 공덕설까지 나아가고 있다. 김 원장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을 종합해보면 기근을 해결하는 데 큰 공을 남긴 이가 바로 신숙주다.

녹두 열매가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수입된 것은 약 550여년 전, 신숙주가 함길도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북변 야인들을 토벌하고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돼 활약할 즈음, 기근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빨리 자라고 쉽게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서 영양이 풍부한 녹두 열매를 수입해 콩나물처럼 물을 주어 키워 먹을 수 있도록 좌의정 신숙주가 권장했다 해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숙주나물은 영양이 풍부해 구황작물로 손색없다. / 엄정권 기자

* 신숙주 탄생 600돌 기념 학술대회가 10월 27일 열렸다. 신숙주의 여러 업적을 올바로 이해하고 업적들이 학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역사학자 한글학자 등이 발표했다. 이 기사는 발표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 학술대회 발표 내용을 4회 예정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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