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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 칼럼]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
황태영 수필가 <보림S&p 부사장>

[독서신문] 이백은 풀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고 나무가 되려거든 솔이 되라고 했다. 난초는 그윽하여 향풍이 멀리가고 솔은 추워도 그 모습을 아니 바꾼다. 사랑도 화려하고 변덕스런 사랑보다 그윽하고 변함없는 사랑이 좋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3살 백석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모던보이였다. 큰 키와 깔끔한 외모, 영어에 능통했고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킨 지식인이었다. 그는 단 한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쓰지 않았고 모국어의 힘을 깨닫게 해주었다.

백석이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함흥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갔을 때 운명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서 이임하는 교사의 송별연이 있었다.

백석은 서로 대화가 되고 격이 있던 기생 진향에게 첫 만남부터 빠져들었다. 입에도 잘 안 대던 술을 대취하도록 들이키고 진향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 따위는 없을 거요.” 그리고 이태백의 ‘자야오가’에서 딴 ‘자야’란 호를 그녀에게 붙여주었다.

마음이 깊이 통한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하숙을 정한 뒤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꼭 재앙이 따르곤 한다. 자야는 기생이었기에 백석을 만날 수 있었지만 또한 기생이었기에 백석과 혼인을 할 수가 없었다.

백석은 기생을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봉건적인 부모님의 강요로 세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번번이 집을 나와 자야를 찾았다. 아무리 둥글어도 달은 물결 속에서 이지러지게 되고 아무리 깨끗해도 가지 위의 눈은 곧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온정균은 둥글고 둥근 사랑이 물결 속의 달이 되게 하지 말고 희고 깨끗한 지조가 가지 위의 눈이 되게 하지는 말아 달라(團圓莫作波中月, 潔白莫爲枝上雪)고 소망했다.

둘은 아팠다. 완벽하고 고결한 사랑을 꿈꾸었지만 사랑은 이지러지고 흙이 튀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 둘이 살자고 했지만 자야는 백석의 장래에 누가 될까 거절했다.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자야는 ‘나처럼 천한 여성을 한 시인이 사랑해서 한 줄 나타샤로 만들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살겠다.’며 평생 백석을 기다렸다.

자야는 살아생전 일 년에 단 하루 밥을 먹지 않는 날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백석의 생일이었다고 한다. 분단의 비극으로 3년의 사랑을 잊지 못해 평생을 그리움과 눈물로 보내야 했던 자야. 그녀는 세상을 떠나며 천억의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넘기고 나머지 돈은 백석문학상 제정을 위해 창작과 비평사에 기탁을 했다.

그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천억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말과 함께 죽으면 눈이 내릴 때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야는 죽어도 백석을 기다리고 싶었다.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이 응앙응앙 흰 당나귀를 타고 길상사를 꼭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리고 싶었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을 그리워했던 두 사람. 이제는 백석도 자야도 한줌 흙, 한 줄기 바람 되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기생도 갔고 교사도 갔다. 둘을 가두고 옥죄었던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한 점 구름이 되었다.

잘남도 못남도 모두 다 사라졌지만 그 둘의 맑고 고결했던 사랑만은 길상사를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되어 있다. 그 둘은 눈이 쌓이는 날 차별도 탐욕도 없는 세상에서 눈밭을 뒹굴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눌 것이다.

요즘은 다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재산만 따지지 사람은 보지 않는다. ‘축록자 불견산(逐鹿者 不見山), 확금자 불견인(攫金者 不見人)’,…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쥐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과 즐거움에 안주하면 다른 값지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게 된다. 안락을 추구하는 사랑보다 어려움이 있어도 한줄 시, 한 순간의 사랑에 인생 전부를 줄 수 있는 사랑이 더 아름답고 그립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난초는 깊은 산속에 자라며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우는데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고 했다. 비록 삶이 고되고 힘들어도 한번 준 마음 변치 않고 둘이 함께 있기만 해도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은 그런 사랑이 다시금 세상을 밝히기를 기대해본다.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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