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전문 번역가 김남주 “번역가로서의 ‘자격지심’이 대체 불가능한 ‘자부심’으로”
가즈오 이시구로 전문 번역가 김남주 “번역가로서의 ‘자격지심’이 대체 불가능한 ‘자부심’으로”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7.10.2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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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5일 저녁 8시(한국 시간), 2017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발표됐다. 일본계 영국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치고는 비교적 젊은 나이 63세. 올해도 스웨덴 한림원은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다른 인물, 가즈오 이시구로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래도 2015년에는 전쟁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지난해에는 미국의 대중음악가 밥 딜런을 선정한 것에 비하면 ‘노벨문학상’다운 선택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를 낯설어 했다. 부커 상을 받고 영화화된 작품 『남아 있는 나날』과 현재까지 발표된 것 중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보내지 마』가 문학상 수상 이후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지만, 대부분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 궁금해서 구매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누구보다 좋아하고 반겼던 이가 있다. 국내에 번역된 이시구로의 책 8종 중 5종을 도맡아 번역한 김남주 씨다.

23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주 씨는 20분 가까이 가즈오 이시구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실 김남주 번역가는 30년 가까이 프랑스 문학을 전업으로 번역해왔다. 종종 영미문학 번역도 했지만, 전공은 불문학이다. 1988년 문학 번역을 시작해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프랑수아즈 사강, 로맹 가리 등 유수한 고전을 번역했고 가즈오 이시구로를 비롯해 현재 왕성히 활동 중인 작가의 작품들까지 고루 번역해 내년이면 ‘번역 30주년’을 맞는다.

그는 독자들이 자기 취향을 갖고 책을 골랐으면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1만 부, 5000부 팔리는 책들이 많아지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어주고, 작가들은 그런 독자들과 함께 커 가는 출판 풍토를 꿈꾸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김남주 번역가와의 일문일답.

-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문 번역가입니다

“민음사에서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번역을 부탁했을 때만 해도 그를 잘 몰랐어요. 들여다보니까 ‘아, 『남아 있는 나날』의 원저자구나’ 이렇게 된 거죠. 책을 읽어보니 굉장했어요. 식탁에서 읽다가, 소파, 침대, 책상으로 옮겨 가면서 반 이상을 읽고 편집자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번역하겠다고. 『남아 있는 나날』을 번역한 송은경 선생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가 맡게 됐어요. 출판사 회의 결과 저와 분위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실제로 이시구로의 문체가 불문학과도 통하고 제 취향과도 잘 맞아요”

- 가즈오 이시구로, 어떤 작가인가요

“기억의 질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에요. 전쟁 소설, 풍속 소설, 추리 소설, 심지어는 공상과학 소설, 판타지 소설까지 작품마다 장르를 넘나들면서 기억의 문제를 섬세하게 다뤄요. 절대로 요란하지 않아요. 문장을 꿰맨 흔적이 안 보인다고나 할까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학 본령에 닿은 질문을 하는 작가에요. 상징과 함축이 너무 강하지도 않지만, 들여다보면 문장으로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행간에 있어요”

- 이시구로의 작품을 번역하는 내내 행복했다고요

“몇 년을 번역하다 보니까 이시구로에 푹 빠져서 ‘이것이 그의 문장인가, 나의 문장인가’ 하는 정도가 됐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작가를 너무 모르더라고요. 동료들조차 ‘나 요즘 이시구로 작품 번역해’라고 말하면 ‘너 일어도 해?’라고 답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노벨상이라도 받아야 알려나? 하고 농담했었죠. 그게 현실이 됐네요”

- 내년이면 번역 인생 30주년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생각보다 별것 없어요. 내가 참 오래된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 (웃음)”

- 번역한 작품 중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게 있다면요?

“(기자가 흔한 질문이라고 하자) 흔한 것 같지만, 흔히 듣지 못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2001년 번역했던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문학동네)라는 작품이 떠올랐어요. 16편의 글이 담겨 있는 단편집인데, 한 편 한 편 세공을 다 달리한 보석 같아요. 어떤 건 굉장히 단문이고, 어떤 건 한 페이지 되는 분량의 한 문장으로 돼 있어요. 주제도 굉장히 다양해요. 로맹 가리의 관심사를 모은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문학이라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다’라는 평을 봤을 때 번역가로서 꽤 뿌듯했어요”

- 프랑스 문학 전문 번역가로서, 프랑스 문학의 매력은 뭘까요? 번역한 작가들도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일단 프랑스 문학은 중독되면 답이 없습니다. (웃음) 정념, 열정, 인간을 굉장히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해요. 그리고 뉘앙스를 중요시해서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최근에는 야스미나 레자 작품을 번역하는데,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은 ‘아트’라는 희곡 작품의 저자에요. 소설에서는 현장성 있는 현대 파리의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 굉장한 통찰이 있어요. 알베르 카뮈는 첫사랑처럼 가슴이 아리는 내 문학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의 문학성은 단편집에서 드러나요. 단편이라는 장르가 소설가의 정수를 보여줘요. 작가의 관심사를 많이 보여주고, 압축하고, 정제해서 보여주니까요”

- 집필하신 번역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를 보면 ‘저자가 아닌 역자로서 느껴야 했던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감정이었나요

“저자는 한 명이고, 역자는 대체 가능하잖아요. 보통 그런 생각으로 번역을 시작해요. 자격지심이 뒤따라오죠. 하지만, 번역을 끝낸 뒤에는 생각이 달라요. 번역자만큼 그 책을 뒤집어 보고, 긁어 보고, 꼬집어보고, 엎어 본 사람이 없거든요.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대체 불가능해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도, 그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보낸 몇 년이 쭉 떠오르더라고요. 그것이 번역의 매력이에요”

- 번역가가 아닌 저자로도 두 권의 책을 내셨습니다. 특히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그동안 쓴 ‘옮긴이의 말’을 모아 놓은 것인데요. ‘옮긴이의 말’이 아니라 한 편의 문학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날카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철이 들수록 ‘나는 문학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잘하는 게 문학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것이 문학이었어요. 그런데 번역을 다 끝내고 나면 좀 허탈해요. 어찌 됐든 남의 말이니까요. 그래서 ‘옮긴이의 말’이라는 이 몇 페이지의 공간이 제게는 중요했어요. 나중의 내가 그때의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볼 수 있는 코드도 집어넣으면서 그 공간을 많이 의식했어요. 20여 년 쌓였을 때 한 권의 책으로 묶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지난해 출간된 『사라지는 번역자들』도 소개해 주세요

“프랑스 아를에 가서 여러 번역자들과 만나 느낀 점들을 담은 책인데요. 이때 번역자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됐어요. 번역자들은 굉장히 까다롭고 생각이 날카롭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문화에 많이 열려 있어요. 그래서 자유로운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고 그 매력에 푹 빠졌어요. 문학과 번역과 삶과 인간에 대해서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책에 소개했어요”

- 앞으로도 번역 외에 집필도 병행하시겠죠?

“네. 뒤늦게 시작한 만큼 1년에 한 권 정도는 쓰려고요. 『사라지는 번역자들』의 배경이 아를인데요. 그 도시에서 지내면서 느꼈던, 흘러가는 생각들을 담아서 여행서를 한 권 낼까 해요. 투명하게 번역한 시들도 모아서 한 권 낼 예정이고요. 저는 시를 정말 좋아하는데, 번역할 때 너무 사전적 단어에 묶여 있는 것 같아요. 번역자가 전체를 보고 그것을 통과할 때 시의 감동이 전달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지금까지 시를 번역한 적이 없어서 벅차겠지만 도전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편협하게, 취향대로 고른 소설도 50편에서 100편 정도 모아볼 계획입니다. 이런 것들을 좀 지나가야 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도 낼 수 있겠죠. 제 노트북 안에 방이 많아요. 생각날 때마다 채우고, 마음이 쏠리면 하나를 꺼내봅니다”

- 작업 내내 책과 함께하니 ‘독자로서의 읽기’는 피로할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책을 즐겨 읽으시나요

“독자로서는 철저히 읽고 싶은 책을 읽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읽어야 기억에 남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아요. 요즘은 에세이나 평론 많이 읽어요. 나이가 드니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 좋아요. 함축 많은 책도 좋아요. 저는 포스트잇 없이는 책을 잘 안 읽어요. 그래서 책 한 권 보면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있어요. 다 읽고 나면 노트북에 정리를 하는데요. 그 다음에는 그 책을 떠나보내도 되는지, 갖고 있어야 하는지 답이 나와요. 떠나보내도 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하는 편입니다”

- 직역·의역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요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라는 표현을 쓸게요. 원문을 훼손하더라도 유려한 번역이 ‘부정한 미녀(의역)’고, 읽기는 불편하고 울퉁불퉁한데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정숙한 추녀(직역)’에요. 한 단락 안에서도 두 가지가 섞여요. 어떤 문장은 표현을 건져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문장은 확실하게 의역해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거든요. ‘의미’가 가장 중요해요. 번역가들은 재량권을 가지는 만큼, 책임도 집니다. 저는 ‘정숙한 추녀’ 쪽이에요”

- 번역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크게 두 가지를 따져 봤으면 해요. ‘내가 번역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번역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요.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두껍지 않은 한 권의 책을 직접 번역해 보라고 하고 싶어요. 마침표를 찍고 나면 본인이 해도 될지 아닐지를 알 거예요. 해도 되겠다 싶으면 책을 들고 출판사를 두드려 보세요. 그럼 번역료, 인세 얘기가 나올 것이고 이 돈을 받고도 행복하겠다 싶으면 번역을 하세요. 내가 행복하게 한 번역으로 독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돈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경력을 쌓아야 하니까 번역료를 따지지 않는 이들도 있는데, 경제관념을 염두에 둬야 번역가의 지위도 높아져요. 내가 하는 행동이 나비효과처럼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움직였으면 해요” / 이정윤 기자, 사진=이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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