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 “훈민정음 반포 일등공신 신숙주 재평가 마땅, 27일 신숙주 학술대회”
[인터뷰]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 “훈민정음 반포 일등공신 신숙주 재평가 마땅, 27일 신숙주 학술대회”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0.2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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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신숙주 선생이 훈민정음 반포와 국방 외교에서 남긴 업적을 후손들이 정확하게 평가를 하고 기려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재평가를 해야 할 인물로 누가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경제적 흑자를 달성해 백성들 삶을 윤택하게 했다는 조선 초기 이방원부터 조선의 르네상스 기반을 연 영조대왕,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못지 않게 무적의 함대를 지휘했던 이억기 장군 등을 꼽는다.

그런데 국어학자와 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도운 공로자인 보한재 신숙주 선생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특히, 한글학회는 고령신씨대종회와 함께 ‘보한재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한글박물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사)의 후원으로 27일(금) 국립한글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다.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

이번 학술대회에는 융합 인문학자, 훈민정음 반포 공로자, 정치가, 외교관, 국방 전략가, 문화 예술가 측면에서 신숙주 선생을 업적을 살펴본다. 각 분야의 학자들이 발표하는 신숙주 선생에 관한 핵심 업적은 이렇다.

"조선왕조의 터전이 아직 튼튼히 잡히지 못한 건국 초기에 외교 국방 내정의 어려운 국사를 한 몸에 지니고 5백년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고유문자를 갖지 못한 이 겨레에 문자를 가질 수 있도록 세종을 도와 문자 혁명을 대성케 하였다.

문과 무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탁월하여 세종조에서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여섯 왕조를 섬기며 명과 일본을 내왕하며 국위를 선양하였다. 북방 야인을 정벌하고 평정하여 변경의 근심을 없앴으며, 내정을 쇄신하여 신흥 국가를 반석 위에 안정시켰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①‘훈민정음, 동국정운과 음운학자 신숙주’(김슬옹, 연세대) ②‘조선통신사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허경진, 연세대) ③‘신숙주의 대일·대명 외교전략’(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④‘조선초 격변기 신숙주의 정치적 역할’(신병주, 건국대) ⑤‘신숙주의 국방정책’(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⑥‘조선전기 미술평론가 신숙주’(고연희, 성균관대) ⑦‘조선전기 서예가로서의 신숙주’(이기범, 경기대) ⑧‘보한재  전집과 신숙주 평전’(박덕규, 단국대) 등을 발표한다. ‘신숙주 공적비’ 외 관련 사진과 ‘신숙주 평전’, ‘신숙주 유물과 서적’도 전시한다.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을 10월 1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한글학회는 1908년 창립 이래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 및 발전을 이끌어온 국내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다.

- 신숙주 선생의 업적이 어느 정도인가요?
“신숙주 선생은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큰 업적을 남긴 우리 말글 연구가입니다. 선생은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젊음을 다 바쳤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하여 《운회》,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선생이 관여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선생의 높은 업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또 어떤 업적이 있나요?
“훈민정음 창제 전인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했습니다. 1447년에 집현전 응교가 되어서 《동국정운》과 《사성통고》의 편찬을 맡았는데, 연구를 거듭해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 집필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 중국 요동지방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면서요?
“선생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와서 음운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수천 리 먼 길인 요동지방을 열세 차례나 왕복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한글로 표시하는 운서(韻書)를 편찬할 때, 참고 사항을 묻기 위해 요동에 유배 중인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사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세종대왕은 신숙주 선생이 진수(眞髓)를 캐어 올 인재로 판단하고 사신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한글 창제에서 신수주 선생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찬은 신숙주 선생이 그의 어음(語音)만 듣고도 음운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자 크게 놀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 다른 분야에서도 업적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정치, 외교, 국방 분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신숙주 선생은 훈민정음과 운서 연구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명나라와 일본에 파견된 외교관으로서 외교 업적도 남겼고, 강원도·함길도에서 야인을 정벌해 국방 업적으로도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 등 주요 분야에서 선생 업적의 혜택을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번 학술대회는 이러한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높이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 어떤 사례가 있나요?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 등 중요 분야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매우 넓습니다. 55세였던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의 명으로 세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해동제국기》를 지었습니다. 조선 시대 내내 지침서가 되는 일본과의 외교 지혜를 남긴 것입니다.

56세였던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선생이 총괄하였습니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 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습니다.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번역 관련 책을 펴냈으며 또 일본, 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 선생의 업적을 기릴 필요가 있겠네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계승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도 의정부에 신숙주 선생 묘소가 있는데, 1971년에 저희 한글학회에서 ‘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한글학회는 사적비에 새겨 둔 뜻을 굳건히 이어가겠습니다. 신숙주 선생 육백 돌을 기념하며, 온 국민이 선생의 ‘말글 사랑,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말글과 나라가 더욱 발전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 허 웅 전 한글학회 이사장이 작성한 사적비문에도 선생을 기린 내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하늘이 우리 겨레에 복을 내리사 불세출(不世出)의 준재(俊才)를 이 땅에 보내시어 어진 임금을 보필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금자탑인 한글을 창제하게 하시고 두 번이나 영의정의 대임(大任)을 맡으시어 외교·국방·문화면에 이르기까지 널리 탁월한 치적을 낳게 하시니 그 분이 바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이시다.

성장함에 따라 뛰어난 예지는 하나를 들어 열을 깨쳤고, 비범한 문재(文才)는 당대 선비들이 크게 놀라는 바였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실 제  대왕을 협찬한 여덟 신하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뽑으셨거니와 오묘한 뜻과 어려운 이치는 선생의 깊은 조예를 힘입어 밝혀진 것이 많았다.’“

- 또 어떤 사연이 있나요?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산과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도비문 등에 무려 13번을 다녀왔다고까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실제로 그 먼 곳을 13번이나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그의 젊음을 다 바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때의 고달픈 여정 속에서 성삼문과 주고받은 시가 《보한재집》에 남아 있어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 옛 문헌에도 선생의 역할이 적혀 있겠군요.
“《세종실록》은 신숙주 선생과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간 사건을 간단하게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는 이창신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남겨 놓았습니다.

성종 때인 1487년에 이창신은 ‘세종조에 신숙주ㆍ성삼문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묻게 하여《홍무정운》과《사성통고》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자 훈을 대강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실록 1487.2.2.)“ 

- 선생의 최고 집필서를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동국정운》대표집필입니다. 신숙주 선생은 1447(세종 29)년 31살 때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습니다. 《동국정운》·《사성통고》 편찬의 핵심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1445년 2월 집현전 원로학자들이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운서를 아시오’ 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중국 한자와 한자음 사전인 운서에 관한 연구는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었고 운서에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책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숙주 선생의 최고 한글 업적은 1448년 펴낸 우리식 표준 운서인《동국정운》을 대표로 집필한 걸로 들 수 있습니다.”
 
- 《동국정운》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요?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선생은 ‘이제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하나의 소리라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정음이 음을 전하는 중심 줄이 되었다(自正音作而萬古一聲, 毫釐不差, 實傳音之樞紐也)’고 했습니다. 또,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고 감동을 적었습니다.“

-《동국정운》의 언어학적 가치를 설명한다면
“신숙주 선생은《동국정운》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중국 황제와 지식인들이 중국 한자음을 적기 위한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 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천 년 넘게 적지 못한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된 기쁨을 신숙주 선생은《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우리 동방에서 천백 여 년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 하면서 적은 것입니다.”/ 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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