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의 그림, 이야기를 입다 『빛 혹은 그림자』
호퍼의 그림, 이야기를 입다 『빛 혹은 그림자』
  • 정연심 기자
  • 승인 2017.10.09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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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추워. 코트 하나 ‘쓱’ 해야 겠어요.” “하는 김에 김치도 ‘쓱’해요.” “구두 좀 사줘요.” “이미 ‘쓱’ 해놨어요.” ‘쓱’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한 쇼핑 사이트의 광고다. 이 광고에 영감을 준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호퍼의 작품은 지난 2003년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으로 탄생되기도 했다. 또 2015년 개봉한 영화 ‘캐롤’은 호퍼의 그림에서 고독의 이미지를 빌려왔다.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본다. 행복, 웃음, 사랑이 배제된 관계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지옥처럼 검다.

가장 미국적인 색채로 미국인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화폭에 담은 호퍼.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그의 그림이 이번에는 이야기의 옷을 입었다. 미국 범죄 스릴러의 대가 로런스 블록이 작가 17명과 함께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옮긴 것.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조이스 캐럴 오츠, 퓰리처상 수상작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 등이 참여했다. 이들 작가는 호퍼의 그림을 한 점씩 고른 뒤 거기서 떠오른 빛과 어둠의 이미지를 스릴러, 드라마, 범죄, 미스터리, 환상문학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했다.

로런스 블록은 이 책에 참여할 작가들을 섭외할 때 에드워드 호퍼라는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오직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만을 요구했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한 그림과 맞아떨어져 캔버스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다. 또 어떤 이야기는 그림이 어떤 식으로든 계기가 되어, 캔버스에 모호한 각도로 맞고 튀어나온다.” 로런스 블록의 평처럼 어떤 작가는 호퍼의 그림을 정공법으로, 또 다른 작가는 은유로 읽어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호퍼의 1926년 작 ‘오전 열한시’를 보고 「창가의 여자」를 썼다. 누드 상태로 창가에 앉아 오전 11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여자와 여자가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대로 그렸다.

호퍼의 작품 그대로를 소설에 등장시킨 작가들도 있다. 마이클 코널리는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작품에 가져왔다. 초보 사설탐정 보슈는 시카고 미술관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여자를 감시한다. 제프리 디버는 단편 「11월 10일의 사건」에 호퍼의 그림 ‘선로 옆 호텔’을 인용했다. 이 그림을 담은 엽서가 냉전 시대 소련에서 무기 개발에 협조하던 독일의 과학자에게 가져온 변화를 내밀하게 그렸다.

‘십 년 가까이 노력한 결과, 어디선가 사랑스러운 아기가 나타나 이 방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기 없는 삶을 받아들였다. 적어도 그들에겐 일이 있었고, 여전히 사람들이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것은 축복이었다.’

스티븐 킹은 호퍼의 1932년 작 ‘뉴욕의 방’을 「음악의 방」으로 변주시켰다. 대공황 시대에 벽장이 있는 방에서 신문을 읽는 남편과 피아노 앞에 앉은 부인은 겉으로는 평온해보이지만 기이하게 뒤틀린 일상을 살아간다. 평소 호퍼의 팬이라는 스티븐 킹은 집에 호퍼의 ‘뉴욕의 방’을 걸어뒀는데, 그 그림이 말을 걸어와 음악의 방을 썼다고 밝혔다.

로런스 블록이 쓴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은 자동판매기로 음식을 판매하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을 보고 기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여인을 차갑게 묘사했다.

휘트니 뮤지엄 큐레이터로 일하며 호퍼의 삶과 그림을 연구해온 레빈. 그는 단편 「목사의 소장품」에서 호퍼의 그림 다수를 소장한 실존 인물 샌번 목사를 등장시켰다. ‘그는 어떻게 호퍼의 그림을 손에 넣었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샌번 목사를 직접 1인칭으로 등장시키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외에도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호퍼의 그림처럼 일상적인 공간에 놓인 인간의 빛과 그림자, 불안과 권태, 평온과 광기를 다양한 서사로 풀어내고 있다. / 정연심 기자

 

『빛 혹은 그림자』

스티븐 킹 외 16명 지음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440쪽 |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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