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고 신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어른의 맛–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맵고 신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어른의 맛–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 정연심 기자
  • 승인 2017.10.0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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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흔히 단 것, 튀긴 것, 과자, 사탕을 좋아하는 입맛을 ‘어린이입맛’이라 한다. ‘어른의 맛’이란 무얼까. 생의 신산스러움, 그 맵고 신 맛을 모두 받아먹을 줄 아는 입맛 아닐까. 때론 제 입 안의 것이 너무 맵고 시어도 아이처럼 와락 뱉어내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그것이 어른의 삶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흙 한 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입속의 수분을 모두 다 빨아들이는 흙의 맛은 승신이 언젠가 마카오에서 먹었던 비스킷의 맛을 떠올리게 했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먹는, 마치 황사를 삼키는 것 같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어른의 맛이라고 했던 그 아몬드 비스킷의 맛이었다.”

올해의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강영숙 작가의 「어른의 맛」은 주인공 승신이 흙을 먹는 장면으로 끝난다. 무미건조(無味乾燥)한 흙 맛을 견뎌내겠다는 결심은 오히려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대학동창 호연과 승신은 내연 관계지만, 그마저도 은밀하게 맞닿아있지 못하다. 만남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황사처럼 뿌옇고, 미세먼지처럼 보이지 않는 불안이자 공포다. 승신은 자신이 호연을 만나온 이유가 살기 위해서였는지 죽기 위해서였는지 혼란스럽다. 

그녀에게 중학교 때 친구 수연이 연락을 해온다. 수연은 승신에게 닭을 잡아준 적이 있는 양계장집 딸이었다. 승신은 기계 같기도, 어리숙하기도 한 속물 같은 남편 이야기를 덤덤히 들려주며 수연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매달아놓은 드림캐처를 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악몽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물건이다. “승신은 더 이상 호연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또 남편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승신은 인생은 저 드림캐처의 고리 같은 것이라고 여기며 화단에 쌓인 흙을 입에 우겨넣는다. 그녀는 마카오의 비스킷 같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어른의 맛을 조용히 삼킨다.

대상작 외 우수작품작 수상작은 「조이」,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당신의 나라에서」, 「눈동자 노동자」,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등 6편이다. 각자 다른 작가가 썼지만 이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상실의 시대를 사는 자들의 불안과 고독이다. 그리고 그저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같이 밥을 먹거나, 여행을 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도 사람과 사람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이들 ‘개인’이 큰 세상과 대적하는 법은 그저 제 자리에서 견디거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망한 출판업자의 이야기다. 집 판 돈으로 변제액을 송금하고 돌아오던 밤, 운전대를 잡은 아내는 늘어선 자동차들의 안개등에서 별빛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서 “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다 잊은 봄날의 곰들”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을 본다.

박민정 작가의 「당신의 나라에서」는 부모가 유학을 떠난 레닌그라드에서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 유년을 보낸 아이의 추억담이다. 평생 발표하지 않은 사진을 찍은 비비안 마이어, 고려인들, 대통령을 비꼬는 연극을 만드는 정치인들의 삶을 유쾌하게 그렸다.

손홍규 작가의 「눈동자 노동자」는 애도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일터에서 스물다섯의 청년 윤호가 작업을 하다 사고로 죽는다. 작가는 일단 4만 5,000원을 받고 일하던 젊은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갔다. 너는 문 밖에 있다. 나는 너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조경란 작가는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에서 가족이란 구원인지, 통증인지 의문을 가진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는 집, 가사도우미 경아가 새로 들어온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느슨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대개 밥을 먹거나, 취하거나, 우는 모습이다. 헐겁게 연결된 이들 가족은 이제 가끔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안전히 떠내려가’고 싶다.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을 쓴 표명희 작가와는 함께 앙코르와트를 떠날 수 있다. 주인공 서정은 회사가 기울어 직원을 떠나보내는 일이 힘들다. 아픔을 잊기 위해 떠난 캄보디아에서 뺀질거리면서 돈만 밝히는 가이드 촨을 만난다. 그녀는 촨과 함께 기어이 찾아온 박물관 앞에서 ‘closed’라는 팻말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히 돌아서는 법을 배운다.

이 소설집에서 누군가는 애인을 만나고, 누군가는 타인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또 누군가는 죽은 자를 바라보며 운다. 견고하게 짜인 듯 보이는 세상에서 뿌리를 잃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터. 이들이 저마다 붙들고 있던 끈 하나를 놓는 순간 이 우주라는 동굴은 좀 더 어두워질까, 환해질까. / 정연심 기자

『어른의 맛–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7』

강영숙 외 7인 지음 | 생각정거장 펴냄 | 320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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