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 "지금의 동아시아, 후쿠자와 유키치의 눈으로 다시 보자"…미야지마 교수 '후쿠자와 유키치,동양과 일본의 근대화' 강연 요약
[네이버 열린연단] "지금의 동아시아, 후쿠자와 유키치의 눈으로 다시 보자"…미야지마 교수 '후쿠자와 유키치,동양과 일본의 근대화' 강연 요약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10.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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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 : 문화의 안과 밖’의 9월 23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3섹션 '정치/경제'의 다섯 번째 강연으로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의 '후쿠자와 유키치,동양과 일본의 근대화'를 주제로 진행됐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이날 강연에서 미야지마 교수는 "후쿠자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서 19세기 후반 한국 개화파(開化派)와 친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관여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어 "19세기 동아시아 구조를 만드는 게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후쿠자와가 고민했던 문제를 다시 검토하는 일은 현재와 미래의 동아시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강연 요약.

미야자와 교수

*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다. 후쿠자와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며,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일본의 만엔 권 지폐에 후쿠자와가 그려져 있다. 대체로 일본의 지폐에는 메이지(明治) 시대의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일본 사람들의 역사 인식에 있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는 사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이야말로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일본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는 지금도 유신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헤이세이 유신(平成維新)이라고 하면 현재의 일본을 개혁하려고 하는 용어로서 사용되고, 또한 오사카 유신(大阪維新)의 회라는 정치단체의 이름을 들어본 분도 많이 계실 것이다.

현재 세계는 큰 변동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동의 중심부의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이다. 중국의 재부상(再浮上)이 그 변동의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후쿠자와는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며, 그 구조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 당시 후쿠자와가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일은 현재와 미래의 동아시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가 후쿠자와에 대해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후쿠자와는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구체적으로는 19세기 후반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개화파(開化派)와 친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관여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또한 후쿠자와는 신문을 통해 한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의 한국 인식은 이후 일본의 한국 인식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다. 후쿠자와의 한국 인식을 재검토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구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두 번째 주제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에 나카츠번(中津藩)의 하급 무사인 후쿠자와 메이스케(命助)의 아들로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쯤에 유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일본에서의 유학 보급의 문제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부터 유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인식되어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으로, 19세기가 되어야 유학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후쿠자와 같은 하급 무사의 자제가 유학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유학 보급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늦게 시작된 유학 공부였습니다만 그 후의 진전은 빨랐던 것 같다.

후쿠자와의 경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사건은 1854년에 나가사키(長崎)에 가서 난학(蘭學)을 배우게 된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유럽의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 난학이라는 것은 하란(荷蘭), 즉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의학과 천문학이 그 중심이었다. 난학을 통해서 유럽의 학문을 아는 기회가 열려 있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어느 날 당시 개항장이던 요코하마(橫濱)에 갔는데, 거기에 있는 간판이 거의 영어 간판인 것을 보고 앞으로 영어를 배워야 되겠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후쿠자와는 미국에서 영어 사전을 입수해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후쿠자와는 1858년에 난학숙(蘭學塾)을 설치했는데, 메이지 유신의 해인 1868년에 이 숙을 게이오의숙이라고 개명했다. 이것이 오늘날 게기오의숙대학의 전신이 된 것이다.

후쿠자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학문의 권장(學問ノススメ)』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1872년부터 1876년에 걸쳐서 출판되었는데, 17편으로 이루어진 계몽서이다. 당시 다 합쳐서 3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

특히 그 책의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 말은 지금 일본의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문장이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사람은 누구나 같은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귀하다든가 천하다든가 하는 차별이 없었다. (중략)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을 살펴보면 똑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혹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도 있는 등 사람 사는 모습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실어교(實語敎)』라는 책에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학문을 했는가 안 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학문의 권장』)

후쿠자와와 한국의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류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후쿠자와와 개화파의 첫 만남은 1882년에 김옥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 후 특히 김옥균과는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이 게이오의숙에 유학했다.

후쿠자와의 머리에는 개화파 사람의 모습 속에 옛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있었다. 후쿠자와는 단순히 개화파 사람들을 도와줄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하려고 했다. 게이오의 제자 두 명을 한국에 파견해서 개화파와 협력해서 정치 개혁을 도모하려고 했었다. 그중에서도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라는 인물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근대적 신문이라고 평가되는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출발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을 주저인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을 중심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문명론의 개략』(이하 『개략』으로 약칭)은 1875년에 간행된 책으로, 후쿠자와의 대표적인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의 준비를 위해 1년 이상 다른 활동을 중단해서 집필에 전념했다고 후쿠자와가 말했듯이 상당히 체계적인 내용을 가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책에 관한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 후쿠자와가 주장하려고 했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서양의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일본의 독립을 지켜야 된다, 바꿔 말하면 서양 문명을 수용하지 못하면 서양의 식민지가 될 것이었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후쿠자와가 경계했던 것은 서양 문명의 힘을 눈앞에 보고 일본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특히 양학자(洋學者)라고 불리던 사람들 중에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서양 문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자를 버리고 로마자를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비관론에 대해 후쿠자와는 일본이 서양 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주체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당시 일본에는 서양 문명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안다는 것.

또 하나의 조건은 객관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쿠자와는 중국과 비교해서 일본에는 유리한 조건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다음 문장이 그 핵심적인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왕조는 자주 바뀌었지만 사회의 양상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지존(至尊)의 지위와 지강(至强)의 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하다는 이유에서 오직 공맹의 가르침만이 세상에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중세에 무가(武家)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자 차츰 사회의 기존 체제가 파괴되어, 지위의 존엄성이 반드시 힘의 강대함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힘의 강대함이 반드시 지위의 존엄성을 의미하지 않는 추세가 되고, 사람들은 자연히 지존과 지강을 별개의 것으로 여겨, 마치 한 마음속에 이 두 가지 다른 것을 동시에 받아들여 양자의 활동을 용인한 것이나 같았다. (『문명론의 개략』 2장)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후쿠자와의 심각한 위기 의식의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유학을 강하게 비판한 후쿠자와였지만, 후쿠자와와 유학의 관계는 조금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그는 계몽 지식인으로서 많은 번역서를 썼지만, 그때 고심했던 문제 중의 하나가 서양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였다.

후쿠자와는 새로운 번역어를 많이 만들었고 그중에는 지금도 일본이나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도 말도 많은데, 이러한 번역어를 만들 때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 유학에서 유래하는 말과 개념이었다.

지금은 인권(人權)으로 번역되는 ‘human right’라는 영어를 후쿠자와는 ‘인간의 통의(人間의 通義)’로 번역했다. 여기서 사용된 ‘의(義)’ 자는 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유학적인 개념으로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후쿠자와의 문장에는 유학적인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후쿠자와의 문장이 명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도 그의 한문 지식에 있다고 여겨진다.

후쿠자와는 중국과 한국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중국, 한국 인식을 검토할 때 중요한 것은 후쿠자와의 중국,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의 유학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에 대한 인식 후쿠자와는 세 번에 걸쳐서 구미를 방문했습니다만 그의 구미 여행은 단순히 구미와의 만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미국에는 많은 중국인 이민이 있었고 기항지로 들렀던 홍콩에서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중국을 목격했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여기서 중국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앞으로 중국의 변화에 대해 일본은 최대한 협력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중국을 사국(師國), 즉 스승의 나라라고 하면서 수천 년 이래의 사은(師恩)에 보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희망은 그 이후의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볼 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후쿠자와의 이러한 중국 평가가 어디까지나 중국이 일본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근대화가 일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생각은 후쿠자와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후쿠자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개화파 인사과의 교류를 통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개화파 사람들을 보면서 거기에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도 많은 연구자가 지적해온 그대로이다.

후쿠자와의 한국 인식의 장점과 단점이 이러한 개화파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된다. 즉 개화파에 대해 공감한 나머지 자신과는 다른 타자라는 인식이 부족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초기의 논조 중에는 타자로서의 한국 인식의 맹아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조선국의 인민은 일본국인에 비하면 신체가 크고 먹는 것도 많아 체력이 강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부러워하지만, 조선의 지식인은 옛날부터 나와 견해를 달리하며 조선 인민이 무(武)를 좋아하고 싸움을 즐기는 것을 우려하고 그 힘을 줄이기 위해 문으로 유도하려고 한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과거제도이며, 국민의 학문 실력을 시험하여 관직을 수여하는 제도이다." (「조선정략비고」)

이 문장은 1882년의 임오군란 직후에 집필된 「조선정략비고(朝鮮政略備考)」라는 문장의 일부로, 나름대로 예리한 관찰이며 흥미로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그 후 발전되지 못했고 후쿠자와의 조선 개혁 구상은 다 실패하고 만다.

후쿠자와는 중국에 대해서는 만년에 와서 그 서양화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중국 인식과 한국 인식의 차이가 어떻게 보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생각까지 금할 수 없다.

후쿠자와가 고민했던 문제가 실은 지금도 충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지금은 후쿠자와가 살았던 시대를 잇는 큰 변동기이다. 그리고 그 변동의 중심에 중국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중국을 어떻게 보야 되는가,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할 때 후쿠자와가 직면했던 문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유학의 문제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닌, 앞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런 예감도 강하게 느깐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를 통해 동아시아의 근대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한국 사람에게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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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비에뚜 2017-10-26 19:03:43
말랑말랑하게 후쿠자와를 미화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그는 조선을 일본발전을 위한 희생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울타리론, 번병藩屛론)한 대표적인 조선침략론자입니다. 엄기자 양반,, 지금에 와서 무얼 되새기고 무엇이 지금까지 이어진단 말인지 어째 껄쩍지근합니다. 공부 다시 하고 기자질 하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