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영초언니』 서명숙 “폭압의 시대 맞선 나의 언니여!”
[작가의 말] 『영초언니』 서명숙 “폭압의 시대 맞선 나의 언니여!”
  • 정연심 기자
  • 승인 2017.10.0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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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은 소설집 등 책의 맨 뒤 또는 맨 앞에 실리는 ‘작가의 말’ 또는 ‘책머리에’를 정리해 싣는다.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는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는 소회를 담고 있어 독자들에겐 작품을 이해하거나 작가 내면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독서신문은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를 본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췌 또는 정리해 싣는다. 해외 작가의 경우 ‘옮긴이의 말’로 가름할 수도 있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영초언니는 이미 한국을 떠나 있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영초언니는 2002년 이국땅 캐나다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했고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의 젊은 날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평생 기자 노릇을 해온,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자 의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랜 세월 언니에 대한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순전히 그 여자 최순실 때문이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의 한 장면이 뒷덜미를 낚아채듯 나를 그 시절로 도로 데려다놓았습니다. 최순실을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고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조사를 받으러 가는 도중에 몰려드는 취재진에게 외쳤습니다.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해요!”

순간 40여 년 전,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고는 곧장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막혀 발버둥치던 한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천영초가 외치는 민주주의, 최순실이 외치는 민주주의! 40여 년의 세월을 넘어 똑같이 수의를 입은, 그러나 너무도 다른 생을 살았던 두 여자가 ‘민주주의’라는 같은 단오를 외치는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대학선배 천영초(고려대 신문방송학과 71학번)씨가 이 책의 주인공입니다. 실존인물이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그곳에서 큰 사고를 당해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뇌의 6, 70퍼센트가 손상되는 바람에, 이제는 단순한 말과 행동밖에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초언니는 제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저를 사회 모순에 눈뜨게 한 ‘사회적 스승’이었고, ‘지식인의 모델’이었습니다.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잊혀져버렸습니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력과 정의감이 강했던, 기자가 되고 싶어서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했던, 누구보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한 여자가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몸을 갈아서 민주화에 헌신했는가를,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에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을 겪었는가를, 그 결과 어떻게 망가져갔는가를 증언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 그녀가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온전히 맞추어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정리=정연심 기자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88쪽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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