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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케인스는 자본주의 구원 꿈꾸며 '선한 삶'을 기대했다"…고세훈 교수 '케인스, 자본주의의 갱신' 강연 요약

[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 : 문화의 안과 밖’의 9월 9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3섹션 '정치/경제'의 세 번째 강연으로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의 '케인스, 자본주의의 갱신'을 주제로 진행됐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고세훈 고려대 정부행정학부 명예교수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시라큐스대에서 정치학 석사, 이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학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고려대 정부행정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국가와 복지』, 『조지 오웰』 등이 있고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 등을 공저했다. 그밖에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 R. H. 토니의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등을 번역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7)을 수상했다.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

고세훈 명예교수는 이날 강연을 통해 "케인스는 자신의 이론을 우리가 실제로 사는 경제 세계의 현실주의적 분석으로 재정향시켰기 때문에 '혁명’ 운운하며 그를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자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명예교수는 이어 "케인스가 꿈꾼 것은 자본주의의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원이었고, 그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끈을 한시도 놓아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요약.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 세대 가까운 ‘번영의 황금기(les trente glorieuses)’를 케인스 정책?이론은 아닐지라도?의 실천 덕이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동 기간 고용, 성장, 인플레이션, (불)평등 등 거의 모든 거시경제 지표가 보여준 선진국의 번영은, 내부에선 강한 노동운동이 뒷받침한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를 정착시켰고, 브레튼우즈 고정환율 체제의 질서-케인스가 그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속에서, 개발도상국들의 번영을 착실히 견인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와 실업의 동반 상승-현상과 함께 전후 합의 체제가 돌연히 무너져 내리면서 케인스주의는 하루아침에 모멸의 언어가 되었다.

동시에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기댄 통화주의, 공급 측 경제학, 공공선택 이론 등 반(反) 케인스주의 접근과 탈규제, 민영화, 긴축 등 신자유주의 논리는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 이전인 1980년대에 이미 대서양 양안에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서 이른바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들이 융성했지만, 고전 이론은 학문과 정치와 담론 세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서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이 상황은 최근의 금융위기에도 큰 동요 없이 지속됐으니, 오늘날 케인스주의는 ‘죽은’ 이론으로 취급받거나, 비주류 정치경제학의 사소한 흐름 정도로 힘겹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가 케인스 ‘혁명’ 운운하며 그를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자로 간주하기도 하는 이유는, 그가 현대 경제학의 ‘지혜(conventional wisdom)’로 당연시됐던 고전 분석의 틀에서 먼저 스스로를 해방시켰고, 자신의 이론을 우리가 실제로 사는 경제 세계의 현실주의적 분석으로 재정향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 케인스 혹은 케인스주의가 주류 경제학의 아카데미아에서 사실상 사라진 것이 그래서 우연일 리 없거니와, 정치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케인스는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케인스주의적 합의’ 등 주로 관용어나 수식어 차원 아니면 기껏해야 (금융정책과 무관한) 총수요 관리 혹은 적자재정과 관련해서 막연히 거론되는 실정이다.

케인스 자신도 말했듯이, 그의 고전 경제학 비판은 “그 분석의 논리적 결함”을 발견하는 데 있기보다는 “그것의 암묵적 가정들이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있었다.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가 태어나고 자랐던 19세기 말의 케임브리지는 종교적 신앙이 사라진 자리에 “도덕과학”의 원칙들을 들여놓음으로써 개인과 사회 윤리의 조화, 사회적 질서와 지혜의 원천을 탐구했던 지식인들의 본거지였다.

14살에 장학생으로 이튼에 입학하여 수학, 고전, 역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케인스는 19살이 되던 1902년에 케임브리지 킹스의 학부생이 되었고, 같은 해 출간된 조지 무어의 『프린키피아 에티카』의 압도적 영향을 받는다.

수학전공자-학부 수학 학위는 그의 유일한 학위이다-로 킹스를 졸업한 케인스는 잠시 인도청 관리로 근무한 후 1909년에 확률론에 관한 논문으로 케임브리지 펠로가 되었고, 남은 생애를 케임브리지에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며 방대한 양의 논문, 칼럼, 저술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 세계에의 관심과 개입을 결코 멈춘 적이 없었으니, 그가 영국과 미국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수많은 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1919), 『화폐개혁론』(1923), 『화폐론』(1930) 그리고 유명한 『일반이론』(1936) 등 그의 대표적 저술들은 모두 전쟁과 좌우 전체주의의 발흥 그리고 대공황이라는 격변적 사건들에 대한 그 나름의 통렬한 대응이었다.

그는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당선이 확실시되던 하원 의원 출마를 여러 차례 고사했으면서도, 가령 베르사유 조약의 영국 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했고, 자유당의 정책강령을 작성했으며,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관여했고, 제2차 대전 종전 후 국제경제 체제의 골격을 이뤘던 국제통화기금과 브레튼우즈 체제가 형성되는 데 중심적인 기여를 했다.

그 와중에도 케인스는 사적인 삶을 한시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거니와, 생애 내내 긴밀하게 교류했던 블룸즈버리 동료들, 케임브리지 안팎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단체들을 통해, 그가 미술, 발레, 건축 등 영국 예술에 남긴?많은 경우 재정적 후원자로서?영향력은 가히 전방위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케인스는 고전학파가 고전 이론이 현실과 어긋나는?예컨대 만성적 실업 등 자원의 청산 없는 균형 상태가 지속되는 이유가 ‘현실의 왜곡’?정부나 노조 같은 시장 외부 세력의 개입 등으로 인한?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말한다.

케인스는 고전 경제학이 먼저 이론의 정당함을 가리기보다는, 애초부터 현실과 유리된 이론으로 무장한 채, 그것이 현실에서 유리된 이유를 현실에서 찾는, 다시 말하면 비현실적 가정이 실현 안 된 데 대한 책임을 현실에 귀착시키는 순환적 오류를 범한다고 질타한다.

케인스 혁명의 이론적 작업은 제1차 대전 종전 후의 장기 불황이 절정에 달한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그 상황에서 고전 이론가들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패러다임에 따라, 어차피 ‘한시적인’ 실업의 시기에 정부가 개입하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회복은 더 더딜 것이며, 대공황은 적자생존을 위한 자연의 치유 방식일 뿐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 논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취약한 시장 수요야말로 불황이 심화되는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던 케인스는 정부가 총수요 진작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선한 삶’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의 이론적 시도는 고전 이론뿐 아니라 당시 마르크스 이론과 소련 사회주의로 급격히 경도되던 영국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의 목적도 담겨 있었다.그가 1934년 말과 1935년 정초 두 차례 조지 버나드 쇼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다.

"『자본론』에 대한 제 생각은 『코란』에 대한 생각과 같습니다. … 도대체 이런 책들이 어떻게 불과 칼을 들고 지구의 절반을 활보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 (『자본론』에서 가끔 엿보이는, 그러나 파괴적이고 단속적인 통찰의 순간들 외에는) 오늘날 그 책의 경제적 가치는 전무합니다. … 제가 발견한 것은 시대에 뒤처진 논란들뿐입니다. … 저 자신이 경제문제에 대한 세상의 사유 방식에-제 추측으론 지금 당장이 아니라 향후 10년에 걸쳐-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경제 이론서를 쓰고자 합니다. … 그 궁극적 귀결이 행위와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의 리카도식 토대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현 단계에서 누구도 제 말을 믿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제가 말하는 것이 그저 희망 사항이 아님을 마음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반이론』은 이로부터 정확히 13개월 후에 세상에 나왔다.

논리적으로, 미래의 경제 상황에 대해 통계적으로 신뢰할 만한 예측을 하려면 미래의 샘플을 추출하고 분석해야 한다. 물론 미래로부터 샘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사람들은 미래의 샘플이 과거와 현재 데이터에서 추출된 샘플과 동일하다는 동일성 가정-에르고드 공리(ergodic axiom)-을 도입한다.

곧 에르고드 세계에서 미래는 이미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 시장 데이터의 통계적 그늘이다. 기존 데이터로부터 확률을 계산하고 그 확률을 미래의 산출에 적용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는 고도의 통계적 정밀성을 지닌, 계산 가능한 확실성의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

고전 이론이 암암리에 상정하는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라는 것이 케인스의 생각이었다. 케인스에 따르면, “고전 이론은 너무나 깔끔하고 단순해서 우리는 그것이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단순성 자체를 위해 도입된 불완전한 가설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19세기 고전 이론은 경제정책 결정자는 미래에 대해 완전히 신뢰할 만한 사전 지식을 가졌다고 가정했고, 20세기 초에는, 완전한 지식은 아니나, 기존의 시장 데이터에 기초하여 미래를 확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가정했으며, 20세기 말의 신고전 이론에서는 경제체제의 모든 정책 결정자는 과거와 현재의 시장가격을 분석함으로써, 보험 산정식 예측에 버금가는 ‘합리적 기대’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합리적 기대 가설’로 1995년 노벨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는 “불확실성의 조건에서 경제적 추론은 무의미하다”고 단언하며 “인위적이고 비현실적 명제들을 불러내는 것만이 현실의 정치, 경제 제도들과 독립된, 논리적 결론을 도출시키는 경제학 연구의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자칭 케인시언인 폴 새뮤얼슨 또한, 경제학이 역사 아닌 과학이 되려면, 확실성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따라서 현재의 시장 자료 분석으로 모든 미래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는, 에르고드 공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현실에서 이런 태도는 “확률 분석의 도구를 활용하여 과거의 역사를 통계적으로 미래로 확장할 수 있는 한, 불확실성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에 쉽게 닿는다. 이처럼 확실성 위에 경제과학을 구축하기 위해 에르고드 공리를 필수 요건으로 채택해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이는 적실성 있는 경제학을 구축하려면 인위적인 에르고드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수요 함수와 총공급 함수는 다르기 때문에 세이의 법칙이 현실 경제에 적용될 수 없다는 케인스의 주장이 전후 주류 이론가들에 의해 무시되고 잊힌 것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케인스 정치경제학은 시장체제에서의 인간 행위는 물물교환 체제의 그것과는 달리, 화폐와 시간의 개입으로 인해 불확실성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We simply do not know)”이라는 것이 미래에 대한 케인스의 입장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미래 수익을 추정해내는 지식의 기반이 지극히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후의 투자 수익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통상 매우 협소해서 종종 무시할만한 정도이다.”

그리하여 케인스 이론이 실세계, 곧 현실의 시장경제에 대한 관찰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화폐, 시간, 불확실성이야말로 시장 행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소임을 뜻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가격으로 해소될 수 없고, 시장은 가격 아닌 수량 조절적으로 되며, 균형은 손에 잡히지 않거니와, 불확실성의 문제가 불가피하다면, 화폐는 중요하다.

가령 “기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폐로 거래한다. 유일한 목표는 시작보다 끝날 때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화폐가 중립적이 아니라, 경제주체들의 행위 동기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자체의 역할을 지닌 경제를 살고 있다. 경제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부터 통계적으로 예측 불가한 불확실한 미래로의 시간을 통해 움직이며, 미래의 계약 책무가 특정 화폐로 표시되는 한, 화폐는 구매력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가는 것을 허용하는 가치 저장의 기능을 수행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미래 계약 책무를 해소 못할 가능성에 직면해서, 미래의 계약적 책무를 초과하는 화폐와 유동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더 많은 유동성을 보유하려는 심리는 당연하거니와, 실업의 존재는 화폐 중립성 공리가 폐기되어야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

요컨대 케인스에게 “화폐의 중요성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는 데서 비롯된다.”(강조 케인스) 따라서 “[케인스주의에서는] 화폐가 중요하지 않다”는 밀턴 프리드먼류의 비판이야말로 케인스 경제학의 복합적 성격에 대한 가장 현저한 오해인 것이다.

케인스에게 화폐경제가 완전고용 달성에 실패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완전경쟁의 결여, 노조, 최저임금 등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화폐와 유동자산의 형태로 저축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완전히 유연한 가격체계를 갖는 자유경쟁 경제에서도, 비자발적 실업 가능성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오늘날 실물과 격리된 금융상품에 대한 집착이 상호기금, 헤지펀드, 금융시장의 ‘비합리적 번영’의 시대를 가져왔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해외 부문이 배제된, 사부문의 단순한 자유방임 폐쇄 경제에서도, 단기든 장기든 모든 가용 자원이 완전고용되도록 담보하는 자동 시장 메커니즘은 없다는 것이 케인스의 주장이다.

케인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일반이론』은 매우 난해한 책이다. 누구나 『일반이론』을 언급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 교수들도 읽지 않거나, 너무 어렵고 모호하여 읽을 수 없거나, 읽지 말 것을 권하는 책이기도 하다. 하버드의 그레고리 맨큐?오늘날에도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경제 원론의 저자?는 『일반이론』을 이렇게 평했다.

『일반이론』은 모호한 책이다. 케인스 자신조차 자기가 의도한 바를 완전히 이해했는지 의아하다. 더욱이 경제학의 50년 발전이 추가됐으니, 『일반이론』은 낡은 책이 되었다. 경제 이론 구축의 엄밀성과 이론을 검증하는 자료와 통계적 기법은 반세기 전에는 없던 것이다. 경제의 작동 원리에 대해 우리는 케인스보다 훨씬 잘 알게 되었다. … 오늘날 어떤 거시경제학자도 케인스처럼 고전 경제학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 장기란 ‘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고 오만하게 말할 정도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왜, 케인스 ‘혁명’에도 불구하고, 고전 이론은 부활했는가? 케인스 연구가 폴 데이비드슨은 케인스 혁명은 현실화된 적이 없고 애초에 고전 이론은 죽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케인스의 주된 메시지에 대한 몰이해와 더불어 종전 후 냉전과 더불어 학계를 강타했던 매카시즘 분위기 그리고 자칭 케인시언 경제학자들마저 경제학의 ‘과학’화에 동참하면서 케인스 이론을 주류 경제학에 편입시켰다는 점 등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경제학 연구는 고도로 세련된 방법론적 기교를 활용하는 분석적 조작에 치중해왔지만, 전후 사반세기의 황금기는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실업, 빈곤, 불평등의 정도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최근의 금융위기를 포함한 일련의 ‘비정상적’ 일탈 현상?토마스 쿤의 ‘정상과학’을 벗어나는 상황?이 반복되는데도 경제학의 주류 패러다임이 변치 않는 이유는,경제학은, 그것이 그리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이론이 정책적 실천과 관련하여 당대의 물적, 계급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교호하며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케인스가 추구했던 이상, 곧 ‘선한 삶’을 위해서 경제와 정치문제는 늘 윤리에 종속돼야 했고, 경제학은 보다 상위의 목표인 윤리학의 “주인이 아닌 하인”이 돼야 했다. 케인스는 시장의 근본 문제를 매우 첨예하게 인식했지만, 시장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전제로 시장을 비판한,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자였거니와, 그에게 시장의 문제는 체제 변혁을 통하지 않으면 개선될 수 없을 정도로 불량한 것이 아니었으며, 국가 개입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로 교정이 가능했다.

그가 꿈꾼 것은 자본주의의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원이었고, 그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끈을 한시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가, 많은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선한 삶’을 위한 물적 조건을 만들어주리라는 점을 깊이 신뢰했다.

그가 대공황의 와중에 썼던 유명한 에세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들」에는 ‘선한 삶’에 관한 희망적인 관측들이 넘친다. 가령 멀지 않은 미래에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하고 인구증가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서 대부분의 결핍이 충족되고 나면, “돈에 대한 사랑은 … 어떤 혐오스러운 병적 집착, 정신 질환 전문가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범죄적이고 병리적인 끔찍한 성벽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그때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자유롭게 “분명하고 확실한 종교의 원칙들과 전통적 가치들”을 택할 것이며, 내일보다 오늘을, 수단보다 목적을, 효용보다 선함에 더 가치를 두게 될 것이다.

평생 영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었던 케인스는 출생과 성장 그리고 교육 과정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정치와 관련된 모든 활동 영역에서도 영국의 최고 엘리트 집단에 늘 근접해 있었다.

그는 목적론적이거나 순환론적 역사관에 회의했고 사회와 경제에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수긍하지 않았거니와, 그가 인간 세계에 편만한 무지와 불확실성이라는 요소에 주목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불황이나 실업 등 현대 세계의 경제적 문제들을 정치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 탓으로 돌렸으며-“이성이 죽으면 괴물들이 태어나고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경제학자, 철학자들이야말로 정치가들을 계몽할 책임이 있는 막중한 역할의 행위자였다.

예컨대 그는 영국 노동당의 이상과 열정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식층을 끊임없이 주변화시키는, 무지한 대중이 지배하는 노동당의 반(反)엘리트주의”를 반대했다. 케인스는 평생 신문 칼럼과 방송 등을 통해 대중의 계몽을 위해 헌신했지만, “케인스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방대한 민주적 열정으로부터 대체로 격리되어 있었고,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아주 차가웠다.”

최근 금융위기의 파장과 깊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드문 계기였지만, “케인스 혁명은 결코 일어나 본 적이 없다”는 진단은, 또 한 차례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 엄정권 기자

엄정권 기자  tastoda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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