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詩로소이다-인터뷰] 신현림 시인 "‘반지하’ 청춘들이여, 목련차를 마시며 등불을 켜자"
[나는 詩로소이다-인터뷰] 신현림 시인 "‘반지하’ 청춘들이여, 목련차를 마시며 등불을 켜자"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9.0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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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8월의 끝, 오후의 명동성당 앞은 ‘반지하’에선 상상할 수 없는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 햇볕을 만끽하고 충분한 ‘광합성’을 즐기는 얼굴이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반소매 청년, 그는 몇 층에 살고 있을까. 햇살을 받아 윤기가 흐르는 뽀얀 살결의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짧은 치마 아가씨는 핸드폰이 뜨겁도록 재잘거리는데, 저 아가씨는 원룸에 살까, 반지하는 아닐까. 상상은 지상과 지하와 반지하를 넘나들고….

그때 나타난 여인, 한 눈에 알아봤다. 아니, 알아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생활한복에 작지 않은 캐리어를 끌고 있다. 걸걸하다면 실례이고 허스키하다면 듣기 좋을까. 목소리는 그러나 다급했다. 아침부터 곯았다고 배부터 채워야 하니 해장국이라도 먹고 인터뷰를 하자는 것. 꼼짝없이 인터뷰는 20분 이상 늦춰졌다. 『반지하 앨리스』 시집을 낸 신현림 시인과의 첫 대면은 어수선했다.

신현림 시인

기자가 예약한 커피숍을 뿌리치고 굳이 잘 아는 카페를 고집했다. 햇살 받으며 야외에서 사진을 찍어야 잘 나온다는 게 이유다. 시인은 여자다. 셔터 소리가 날 때마다 포즈를 취한 신 시인은 조신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캐리어에서 책 몇 권을 꺼내 펼친다. 사진집이 눈길을 끌었고 특히 사과 사진은 한눈에 봐도 수준급 예술사진임을 문외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신 시인 허스키가 고음으로 치닫는다.

어느 젊은 작가가 자신 작품의 콘셉트를 베끼다시피 했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 “죽어라 작업한 것을 콘셉트를 도용”했다며 신 시인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냥 뺏길 수는 없어요” 모종의 결단이 있는 듯하다.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지음 | 민음사 펴냄 | 152쪽 | 9,000원

신 시인은 흔히 전방위 작가라 불린다. 시 쓰는 것은 물론, 이미 여덟 차례나 사진전을 연 중견급 사진작가다. 특히 네 번째 사진전 「사과여행」 사진집은 일본 교토 게이분샤 서점과 갤러리에 채택돼 선보이고 있다. 그런 작가가 콘셉트를 ‘도용’ 당했으니 충격이 작지 않다. 신 시인의 사과 사진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찍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과를 공중에 던지고 찍어 그 창의성을 인정받아 평단과 사진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듣고 있다.

아직도 인터뷰 본론에 못 들어갔다. 시집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반지하에서 나오셨다는 말 들었습니다”라고 인사 겸 근황을 물었다. “네, 얼마전 40년된 연립주택 3층으로 이사갔어요”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산자락 즈음이라는 설명이다. 10년만의 반지하 탈출이다. 다 큰 딸이 가장 좋아했다 한다.

큰 딸의 마음을 신 시인의 시 「광합성 없는 나날」로 짐작해본다. “(…)하루 햇빛 한 시간도 안 되는 / 끔찍한 반지하 인생 끔직함마저 끌어안아야 어른이지 / 울지 않아야 어른인 거지 (…) 목에 꽉 찬 미세먼지 / (…) 공장 굴뚝 같은 핏줄에 가득한 슬픈 연기 덩이 // 달이 달로 보이고 / 구름이 구름으로 느껴지게 / 햇살 넘치는 하루가 너무나 그리워”

- 『반지하 앨리스』의 앨리스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상상하면서 분위기만 보는데, 저는 소통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현대인의 애환과 어려움도 있지만 특히 젊은이들과는 소통이 안 되잖아요. 요즘은 더 심해졌죠. 나이들면 폐기물 취급받는 것 같아요. 얼굴도 미워지고, 생의 반이 저는 반지하에 있어요. 저는 생의 반이 갔지만 젊은이들은 생의 반을 꽃피우고 있잖아요. 이들과 서로 등을 켜는 모습을 꿈꾸며 썼어요. 그래야 세상이 바뀌죠”

신 시인은 「광합성 없는 나날」에선 반지하 인생이 끔찍하다고 했지만 표제작인 「반지하 앨리스」에선 반지하가 더 이상 끔찍한 공간이 아닌 마음에 등불을 켜는 따스함이 들어 있다. 그 등불은 젊은이들을 비추고 있고 생의 반을 꽃피우는 그들을 향한 사랑이 들어 있다.

“돈에 쫓겨” 꺼져든 앨리스들이지만. 「반지하 앨리스」 전문을 보자.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 생의 반이 다 묻힌 반지하 인생의 나는 / 생의 반을 꽃피우는 이들을 만나 목련 차를 마셨다 // 서로 마음에 등불을 켰다” 그렇다. 차(茶)는 목련이 제격이다. 국화나 재스민은 아니다. 화사한 봄,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게 신 시인은 반지하의 끔찍함 속에서 목련 한 송이를 키웠다.

- 솔직한 것 같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직전 시집을 평하면서 ‘태아를 넣고 다니는 어미처럼 진정성’을 갖고 있다 했습니다
“그 표현 맘에 드네요. 솔직한 건 집안 내력이에요” 생각지도 않았던 가족사를 다 들었다.

신 시인의 아버지는 과거 민추협 국장을 지낸 신하철 전 의원이다. 감옥을 서너차례 드나들었던 경기도 민주화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의왕 집에 긴급조치 등을 피해 몸을 숨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말한다. 남동생은 모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지금은 개업 의사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진료비를 안 받는 등 의협심이 강하다고 칭찬한다.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하셨고 어머니는 동학을 하는 등 “싸우고 싶지 않은데” 집안에 투쟁 DNA가 있는 것 아니냐며 호탕하게 웃는다.

- 요즘 젊은이들 책도 안 읽고 시와는 더욱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시 정신은 인간의 뿌리라는 생각입니다. 영화나 음악 등에 우리 마음이 가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시 정신입니다”

시를 쓰려면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질문에는 “시 쓰려면 낮아져야 해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밑바닥까지 갔을 때, 외롭고 힘들면 시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기자는 알고 있다. 낮아지고 겸손하다는 말보다 ‘외롭고 힘들면’에 더 무게가 있는 것을.

시를 보며 신 시인의 외로움과 힘듦을 짐작해보았다. 「오늘만큼은 함께 있고 싶다」 “악수밖에 안 했는데 / 내 몸에서 살단 간 듯이 / 당신 손자국이 남았다 (…) 남극처럼 추운 이곳에서 / 얼어죽을지도 모르지만 / 오늘만큼은 함께 있고 싶군요”

그에 앞서 회한 비슷한 것도 느끼게 해 연민을 부르는 시도 있다. 「사랑 밥을 끓이며」 “(…) 내 생의 반은 / 실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 꿀이 흐르는 길을 잃고 / 일만 하느라 사랑도 잃고 /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 (…) 꿈의 아궁이에 해를 넣고 / 사랑 밥을 끓이고 싶다(…)”

반지하에서 오래 살며 딸 키우느라 힘들었고 시 쓰느라 고생했고 사진 찍느라 머리 희었다. 그렇다, 시 쓰는 사람이 심성이 나쁠 수는 없다. 신 시인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시 「나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눈길을 잡는다. “(…)여전히 여자가 살기 피곤한 조국에서 / 사랑의 술잔은 / 한강에 띄우고 / 운명적인 결혼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 남자가 태양같이 쏟아질 때 / 섹스를 좋아한 때가 있었다 (…) // 정드는 게 두려워 고양이와 개도 안 키우는 / 나는 알고 보면 좋은 사람 / 알수록 책임감 강한 사람(…)”

신 시인은 솔직했다. 이야기 실타래가 좌충우돌하며 인생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신 시인은 “늙어가는 슬픔은 아궁이에 처넣어 버렸다” / 엄정권·이정윤 기자, 사진=이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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