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마광수 비보(悲報)는 쓸쓸했다. 더구나 자살이기에 쓸쓸함은 서늘해진 날씨 탓인지 처연했다.
아는 출판사 사장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뜻도 없는 질문을 그냥 ‘투척’했다. 그 사장도 그러게 말입니다를 연신 뱉으며 대책없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먹먹한 가운데 우리사회는 아직 과거에 갇혀 있구나 하는 탄식도 나왔다.
그렇게 10여분이 흐르고 독서신문 인터뷰 기사를 뒤졌다. 아마 생전 마지막 인터뷰인 것 같다. 도저히 몸을 가누기 어려워 전화로 나눈 인터뷰는 절절했지만 원망의 그림자도 없고 비난의 화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양반이었다. 그냥 뭉뚱그려 파란만장이라고 했고 왕따당했다는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필화사건이라 칭했다.
마광수 필화사건(본인 표현)인지 『즐거운 사라』 사건인지 마광수 외설 사건인지, 아니면 뭐라 하든 문단이나 지식사회에선 볼 수 없는 사건이기에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결론삼아 하는 말이지만 두고두고 기억하고 후대에 남겨야 할 사건이다.
법정에서 가려진 사건이기에 시시콜콜 당사자와 피해자의 변도 들어야 할 일이지만 피해자는 갔고 당사자 말은 찾을 길 없고 몇몇 매체에 등장했던 말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곱씹을수록 말도 안되는 사건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 첫째, 『즐거운 사라』가 책으로 나온 때는 1991년. 그리고 강의실에서 강의 도중 체포된 게 1992년 10월. 그런데 책으로 나오기 전 이미 1990년 월간지에 연재됐던 것이다.
월간지에 연재될 땐 문제 안 삼더니 책으로 나오니 외설이라는 말인가. 한꺼번에 읽을 분량이니 문제라는 건가.
말도 안되는 이유 둘째, 항소심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선 두 교수가 마광수 죽이기에 나섰다. 아니 『즐거운 사라』 죽이기에 언사를 보탰다.
한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법적 폐기물’이라 단정했다. 다른 교수가 한 말이 참으로 가관이다. 이렇다. “어떤 비정상적인 청소년이 이 책을 읽고 (사라의)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면 범죄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비정상 청소년’이 ‘성행위를 반복 실천’하면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말. 유치원 애들이 개콘에서 해도 이보다는 잘 하겠다.
말도 안되는 이유 셋째, 그래서 마광수를 잡아넣어서 뭐가 달라졌나. 『즐거운 사라』를 철창에 넣어서 우리나라 성범죄가 줄었나. ‘비정상 청소년’들이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라도 있는가.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의 성범죄를 보라.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나 정작 마광수를 죽인 건 주변 사람들의 배신, 질시 등이었다는 게 마 교수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말로 다할 수 없음은 마 교수 파동에 말려 대학에서 쫓겨난 제자의 입을 통해서도 들은 바 있다.
『즐거운 사라』가 나온 지 26년이 됐다. 마 교수 추모 글이 인터넷에 줄을 잇는다. 과거처럼 색마 등 변태 취급 일변도에서 확실히 변했다. 그러면서 아직 금서로 묶여 있는 『즐거운 사라』를 금서 목록에서 풀어야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금서에서 풀린다면 마 교수의 명예회복도 가능하지 않나하는 추측도 해본다.
한 지인이 말했다. 우리 사회에는 도덕성이라는 고압선이 도처에 있어, 그 고압선에 걸리는 작가들은 예외없이 감전사했다고. 작품 하나, 한 구절만 가지고 외설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 ‘시대착오적 감전사’ 사건을 우리는 덮어놓고 있었다. 맨홀 뚜껑이 가스에 튕겨 나가듯 마광수 가스가 과거를 봉인한 문단 적폐를 날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