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전문] 강정인 교수 '로크와 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네이버 열린연단-전문] 강정인 교수 '로크와 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9.0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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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 : 문화의 안과 밖’의 8월 26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3섹션 '정치/경제'의 첫 번째 강연으로 강정인 서강대 교수의 '로크와 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주제로 진행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이번 3섹션 ‘정치/경제’ 강연은 시대의 사상, 인식 체계의 틀을 깨고 정치·경제의 발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변해 왔는지 살펴 본다.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현대 한국 정치사상: 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며』, 『넘나듦의 정치사상』 등이 있고 『왜 대의민주주의인가』, 『유럽 민주화의 이념과 역사』,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등을 공저했다. 그밖에 존 로크의 『통치론』, 스튜어트 화이트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을 공역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

강정인 교수

1. 글머리에 : 패러다임과 정치사상

네이버 열린연단 네 번째 시리즈의 주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다. 그 취지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와 문학가”를 선정하여 그들의 “사상과 이론의 바탕에 깔려 있는 혁신적 사유의 면모를 조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강연에서는 ‘패러다임의 창조와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이자 존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이제는 고전이 된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서양 과학의 발전 과정이 (통상적인 견해처럼)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변화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와 혁신에 따른 혁명적 변화’라고 새롭게 주장함으로써 일대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 이후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과학을 넘어서 일반 인문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성취로서 일정 기간 동안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자들(practitioners)의 공동체에 모형 문제와 풀이를 제공해주는” 이론이다(Kuhn 1962, x). 과학자들의 공동체는 일정한 합의에 근거하여 연구 활동에 종사한다. 그 합의는 무엇이 과학적 질문으로서 자격이 있고 무엇이 과학적 답변으로 간주되는지 등 탐구에 지침이 되는 규정을 포함한다.

물론 그런 합의는 연구와 검토에 있어서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특정한 이론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때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수용하는 특정한 이론이 바로 패러다임이다(Wolin 1968, 132). 예를 들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천동설과 지동설, 뉴턴의 역학,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을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예로 떠올릴 수 있다.

과학 혁명에 관한 쿤의 발상과 논의에 기대어, 미국의 정치이론가 셸던 월린(Shedon Wolin) 역시 1968년에 발표한 「패러다임과 정치사상(Paradigms and Political Theories)」이라는 논문에서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를 패러다임의 창조(교체, 소멸)와 혁신을 중심으로 설명한 바 있다. 월린은 서양 정치사상사를 수놓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및 마르크스” 등과 같은 사상가들을 “갈릴레오, 하비, 뉴턴, 라플라스, 패러데이, 아인슈타인” 등과 같이 패러다임 창조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 사상가들 각각이 “정치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에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이론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공”했으며, “탐구의 독자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무엇이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시적인 또는 묵시적인 진술”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Wolin 1968, 140). 패러다임 창조자로서 사상가들의 위상에 대해 월린은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로크의 영향, 벤담과 제임스 밀 및 오스틴에 대한 홉스의 영향, 현대 사회과학에 대한 베버와 마르크스의 영향을 예시하고 있다(Wolin 1968, 140).

월린은 정치사상에서 위대한 정치사상의 출현을 자연과학에서 비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의 단계를 거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러나 월린이 보기에, 정치사상과 자연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 과정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 비상 과학이 주로 이론에 내재하는 위기에서 출현하는 데 반해, 정치사상에서 비상 과학의 출현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질서의 위기가 주된 발단이 된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사에서 비상 과학에 대한 모색이 자연계 자체의 변화보다는 주어진 패러다임 내에서 풀 수 없는 이상(異常) 현상(anomaly)의 지속적인 출현에 따라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느끼는 점증하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다면, 정치사상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요구는 그와 같은 이론적인 위기보다는 정치 질서 자체의 임박한 붕괴라는 현실적인 위기에서 발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 마키아벨리, 홉스와 로크, 마르크스는 기존 정치사상의 이론적 위기보다는 아테네 민주정의 파탄, 피렌체 공화정의 파국, 영국 내전과 절대 군주정의 위태로운 복고, 산업자본주의의 위기 등 현실 질서의 임박한 붕괴 조짐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Wolin 1968, 147). 여기서 패러다임 창조와 관련하여 자연과학자와 정치사상가의 역할상의 차이가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조가 자연계의 불변성(항구성)을 전제로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주로 탐색ㆍ제기하는 데 반해, 후자의 경우에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 따라 정치 세계를 재구축하고자 하는 변혁 지향성을 강하게 띤다는 점이다(Wolin 1968, 148).

거칠게 대조하자면, 자연과학자는 자연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설명할지언정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하지 않는 데 반해, 정치사상가는 정치 세계를 새롭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변혁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1 여기서 정치사상을 어떻게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먼저 정치사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비쿠 파레크(Bhikhu Parekh)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사상은 “인간의 정치적 삶에 대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치사상은 세 가지 차원, 곧 ‘개념적’ㆍ‘설명적’ㆍ‘규범적’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정치사상은 “인간의 정치적 삶과 관련된 개념들을 정의ㆍ구분ㆍ분석하며, 정치적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틀”을 발전시킨다. 둘째, 정치사상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설명적”이다. 그것은 정치적 삶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공동체의 상이한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사상은 “규범적”이다. 정치사상은 “정치사회가 현행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비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당대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바람직한 정치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이처럼 정치사상은 정치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사고체계”인 동시에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비전과 운동”을 담고 있다. 따라서 정치사상은 “인간의 현실 생활을 규제”하는 한편 “미래의 삶을 정향케 하는 좌표”로 기능해왔다(Parekh 1992, 535-536).

정치사상을 패러다임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정치사상가들을 패러다임을 창조하거나 획기적으로 혁신하는 위대한 이론가와 일정한 패러다임 내에서 그 패러다임의 세부적 내용을 수정ㆍ보완ㆍ보급ㆍ교육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보통의 이론가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의 공자, 노자-장자, 묵자, 한비자, 주자 그리고 서양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로크, 마르크스 등은 패러다임의 창조자 또는 집대성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한 중범위의 이론가들, 곧 단순히 패러다임 내의 일상적 문제들(puzzles)을 해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론적ㆍ현실적 위기에 직면하여 그 패러다임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버전-업(version-up)하여 혁신한 사상가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자유주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는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와 같은 이론가들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는 베른슈타인,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와 같은 이론가들을, 유가 사상에서는 맹자, 순자, 동중서와 같은 이론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패러다임의 창조자와 혁신가의 구분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라 할 수 있다. 혁신가의 이론적ㆍ역사적 기여가 창조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판명되면, 전자는 집대성자(또는 창조자)로, 후자는 패러다임의 선구자(또는 선행 창조자)로 재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일상적인 수정ㆍ보완ㆍ보급ㆍ교육에 몰두하는 보통의 정치사상 연구자(대학의 교수나 학교의 교사 등)는 정상 과학(패러다임)의 일상적 운영(puzzle-solving: 문제 풀이)에 관여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보면 정치사상은 오늘날 컴퓨터 운영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운영프로그램’ 또는 ‘응용프로그램’ 등 소프트웨어에 비유될 수도 있다.

큰 범위에서 이야기하자면 MS 윈도우나 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크롬과 같은 인터넷 웹브라우저, 작은 범위에서는 MS 워드나 아래아 한글과 같은 문서 작성 프로그램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동아시아의 유가, 법가, 묵가 또는 서양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보수주의 등도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운영프로그램)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유주의에서 자유지상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복지 자유주의 등은 자유주의의 하위 응용프로그램이고,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소련식 사회주의 등은 사회주의의 하위 응용프로그램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비슷한 추론을 자본주의와 그 하위 유형인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복지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적용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 국가의 헌법은 정치체제에 필요한 다양한 운영프로그램을 융합해 명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 민주국가의 운영프로그램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자본주의의 다양한 유형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공화주의 등 여러 요소가 보합ㆍ조제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 민주국가에서 채택되고 있는 위헌심사 제도 또는 헌법재판 제도는 국가의 법률과 정책 및 관행이 운영프로그램에 합당하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감독하고 통제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조 및 발전 관련하여 가령 존 로크는 자유주의 1.0 버전을, 존 스튜어트 밀은 2.0 버전을, 존 롤스는 3.0 버전을 개발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17세기에 활동한 로크를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안자로, 밀과 롤스를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의 상황에 적합하게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업그레이드하여 혁신한 이론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필자는 로크와 밀의 자유주의ㆍ민주주의 사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로크가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창안한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토대를 간략히 서술한 후 자유주의 사상의 개요를 논할 것이다. 이어서 이러한 논의를 염두에 두고 또 이와 대조하면서 밀이 그 패러다임을 혁신한 과정을 철학적 토대의 변화와 자유주의의 심화를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2 존 로크 :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조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절대주의”, “귀족주의적 특권” 및 “종교적 순응”에 대한 반발로 탄생하고 전개되었다(볼, 테렌스ㆍ대거, 리차드 2006, 119-125). 이 점에서 자유주의는 정치적 절대주의 대신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자유로운 시민 정부, 귀족주의적 특권 대신 인간의 평등, 종교적 순응 대신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고 관철시켰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로크의 정치사상에서 자유주의의 이러한 모습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로크는 정치사상사에서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은 로크에 의한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조와 관련하여 먼저 그 역사적 배경 및 철학적 토대를 살펴보고 이어서 자유주의의 구체적 내용―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주제 이외에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제국주의의 관계를 포함시킨―을 간략히 제시하도록 하겠다.

1) 로크의 『통치 2론』, 사회계약론, 자유주의

로크는 자신의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사회계약론이라는 이론적 장치를 통해 선구적으로 고안했다. 로크의 주저이자 정치철학의 집대성인 『통치 2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은 두 편의 긴 논문인 『제1론』과 『제2론』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오늘날 널리 읽히는 것은 ‘시민 정부’를 논한 로크의 『제2론』으로서 이 논문은 휘그당의 원칙을 정당화하고 명예혁명을 옹호하는 로크의 정치철학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로크는 『제2론』의 모두에서 정치권력의 목적이 인민의 재산(생명ㆍ자유ㆍ자산) 보전과 공공선의 실현에 있다고 선언한다. 로크는 이러한 정치권력 수립의 근거를 자연법과 사회계약에서 찾는 관점을 제시하고, 이어서 사회계약을 통해 생성되는 정치권력의 내용 및 그 행사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크 정치철학의 핵심 내용은 대부분 『제2론』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로크의 『제2론』을 편의상 『통치론』이라 부르고, 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로크의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간략히 살펴보고 뒤이어, 로크의 관용론을 검토한다.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1651년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 출간부터 1762년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 출간까지의 약 한 세기는 흔히 “사회계약론의 위대한 시대”라고 불린다(바커 1995, 16). 사회계약론은 서양의 중세 질서를 뒤흔들고 근대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조형한 일련의 시민혁명―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영국의 법학자 헨리 메인은 『고대 법』에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유명한 구절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서구 문명이 타고난 신분을 위주로 구성된 중세 사회에서 평등한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된 근대 사회로 이행한 역사적 사실을 단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사회계약론자들이 던진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시민의 정치적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정치적 권위는 과연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중세와 달리 혁신적인 것으로서 정치적 권위란 시민의 동의나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답변은 ‘모든 인간은 본성상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새로운 근대적 인간관에 기초했다.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서구 자유주의는 자연상태에서 본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을 이성과 욕망의 주체로 인정한다.

인간이 개인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갖추고 있으며, 또 이를 이성에 따라 규율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라고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통된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에서 자기 이익의 무제한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개인들 사이에 이익 갈등을 야기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이론적ㆍ제도적 장치에 대해 고민했고, 그 결과, 자연상태에서 관찰되는 무제한적인 자기 이익 추구의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 권리를 상호 동등하게 포기ㆍ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회계약을 이론화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층이 지배 이념을 활용하여 위에서 수직적이고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기 이익 추구를 통제했던 것 대신 내놓은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이성의 주체인 개인들이 맺는 사회계약을 통해 사회를 혼란으로부터 구제하고, 동시에 일정한 한계 내에서 자기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2) 『통치 2론』이 탄생한 논쟁적ㆍ정치적 맥락: 왕권신수설과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격돌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로크가 어떻게 창시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영국의 구체적인 논쟁적ㆍ정치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피치자(신민)의 동의에 기초한 정부, 즉 사회계약론을 주창한 로크의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당시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던 왕권신수설 패러다임과의 치열한 사상 투쟁의 산물이었다. 로크가 『통치론』에서 논박의 대상으로 삼은 로버트 필머의 왕권신수설은 기독교 및 성서에 대한 당대의 주류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필머는 성서에 근거하여 신이 인류의 시조로서 창조한 아담에게 그 자식들―곧 인류―과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지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러한 권한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이 신민과 그들이 사는 영토를 통치자들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통치자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는 신민들은 통치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민의 재산권 역시 왕이 시혜로써 허락한 것(증여)이기 때문에 왕은 신민의 동의 없이 그들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던 1995, 108-109).

이에 대해 로크는 자연법에 따라 본래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절대군주정하에서는 생명에 대한 처분권마저 군주의 손에 달린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에 빠지는데, 이는 신의 법인 자연법에 반한다는 주장으로 반격한다. 그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군주라도 침해할 수 없는 생명ㆍ자유ㆍ자산에 대한 자연권과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정부’를 옹호하고자 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당한 논거를 제시함에 있어 로크는 필머의 왕권신수설 패러다임을 부정하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기독교와 성서가 지닌 지고의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의 이념적 지형을 고려할 때, 로크에게는 자신의 초보적인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문명으로부터 수입하거나 아니면 유럽 문명 내에서 달리 찾아내어 활용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로크에게 열려진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와 성서를 필머와 ‘달리’ ‘혁신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가 신민이 자발적으로 체결한 사회계약에서 비롯된 것이고, 생명ㆍ자유에 대한 권리는 물론 재산권 역시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신이 인간에게 공유물로서 준) 자연의 일부에 자신의 노동을 섞음으로써 어느 누구의 승인 없이 획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는 기성 질서를 옹호하던 필머와 그것에 도전하던 로크가 ‘기독교’라는 동일한 문화적 지형 위에서 사상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중세 이래 기독교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는 데 활용되었기 때문에 그 지형은 로크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시자로서 로크는 가장 반자유주의적이었을 법한 기독교의 교리와 성서로부터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해석을 힘겹게 이끌어내었다. 그는 외부의 사상적 자원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기독교와 씨름함으로써만, 그리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지하도록 재해석함으로써만, 자신의 자유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상 투쟁은 무척 힘겨운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투쟁의 적과 공유하는 기독교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을 경우 적의 저항을 반감시킴으로써 그 효과가 배가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후 영국과 유럽에서 근대 역사는 필머의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로크의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로크는 그 패러다임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요컨대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 이후 격렬히 충돌한 지배적 패러다임인 왕권신수설과 (새롭게 부상한) 대항 패러다임인 자유주의는 명예혁명을 극적인 계기로 하여 그 균형추가 급속히 자유주의로 쏠리기 시작했고, 18~19세기에 자유주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서 그 위상을 굳히는 단계에 들어섰다.

3) 자연법과 사회계약

로크의 『통치론』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모두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자 “평등의 상태”에 놓여 있다(11).2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신의 명령인 자연법에 따라 정당화한다. “자연상태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 있으며 그리고 그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그 법인 이성은 ……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13). 또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연법을 집행하고 수호하는 사람이기도 한데, 이로써 자연상태가 유지된다(14-20).
로크에게 자연상태는 이처럼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목가적인 상태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욕망, 이성의 불완전함 등 인간이 지닌 다양한 약점으로 인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침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적의(敵意)와 파괴의 상태”인 “전쟁상태”로 돌입하기 쉬운 매우 불안정하고 “불편한” 상태이기도 하다(23). 게다가 자연상태에는 공통의 동의를 통해 확립된 법률, 공평무사한 재판관, 그리고 법률 집행의 권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 취약성이 가중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자연상태는 개인의 인신과 소유물을 보전하기에는 불편한 상태라 할 수 있다(119-121). 그래도 화폐가 도입되기 이전인 초기의 자연상태는 “권리와 편의가 조화롭게 부합하는 상태”로서 인간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적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었다(54). 그런데 이런 상태는 화폐가 등장하면서 변화한다. 화폐 도입으로 무제한적인 재산 축적이 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빈부 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이제 재산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격렬해진다. 따라서 비교적 평화롭던 초기의 자연상태는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전쟁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전쟁상태로 치닫는 격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인신과 소유물을 안전하게 보전해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계약을 체결해 국가권력을 수립한다. 『통치론』에 나타난 사회계약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국가권력 설립의 원인은 자연상태의 폐단에 있고, 그 성립 조건은 성원들의 합의이며, 그 내용은 자연권(자연법의 집행권)의 신탁적 양도이고, 권력의 수탁자는 입법권과 행정권을 갖는 공영체(또는 국가)이며, 그 목적은 성원들의 재산의 보전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된 국가나 정부의 정당성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는 ‘인민의 동의’라는 주관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선의 추구’라는 객관적 요소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정치공동체에서 ‘공공선의 추구’는 정당성의 불변적 또는 항구적 요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또는 피치자)의 동의’는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정당성의 요소로 명시적으로 추가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 사회계약론의 자유주의적이자 민주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4) 국가권력의 분립과 의회중심주의(입법권의 우월성)

로크는 『통치론』의 서두에서 정치권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면서 정치권력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그것[정치권력]은 사형 및 그 이하의 모든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권리이며, 또한 재산(property)을 규제하고 보전할 목적으로 그러한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commonwealth)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 모든 것을 오직 공공선(公共善)을 위해서만 행사하는 권리이다(9-10).

이처럼 정치권력은 인민의 재산(생명ㆍ자유ㆍ자산)의 보전과 공공선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하며, 법률 제정권과 법률 집행권 및 국가 방위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크는 『통치론』 12장에서 국가권력의 내용을 입법권ㆍ집행권ㆍ연합권으로 정리하면서 입법권을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국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지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권력”으로서 “법률을 공공선”을 위해서 제정한다고 규정한다(139, 40).

로크는 입법권과 별도로 독립된 집행권, 즉 행정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법률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단기간에 만들어지지만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부단(不斷)한 집행 혹은 그것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한다(140). 입법권과 집행권(행정권) 이외에도 로크는 전쟁 수행 및 외교와 관련된 연합권이라는 권력을 구분한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입법권과 행정권 및 연합권의 셋으로 나누고, 그 관장 기구를 입법부(입법권)와 행정부(행정권과 연합권)로 나누는 권력의 이권(二權) 분립론을 제시한다. 이처럼 로크는 몽테스키외보다 일찍 권력 분립론을 제창했지만, 그의 권력 분립론은 사법권이 독립된 지위를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로크는 국가가 보유하는 세 권력 중에 입법권이 가장 우위에 있는 권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의회중심주의를 천명한다.

그는 “정부가 존속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입법부가 최고의 권력”인데, 그 까닭은 “다른 사람을 상대로 법률을 만드는 자가 그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입법부는 “사회의 모든 부분들 및 그 구성원들을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을 작성”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집행권을 부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입법권은 필히 최고의 권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44).

따라서 최고의 권력인 입법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정부 형태가 달라진다. 입법권이 다수에게 있으면 “민주정”이 되고, “선택된 소수 또는 그들의 상속인이나 후계자들의 수중에 위임”되면 “과두정”이 되며, 한 사람의 수중에 맡겨지면 “군주정”이 된다(125).

5) 인민의 저항권과 인민주권 사상

로크는 인민의 저항권을 자유주의 사상의 요체로 제시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그는 인민의 저항권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정당화한다.

정부의 목적은 인류의 복지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인민이 항상 폭군의 무제한적인 의지에 신음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통치자가 권력을 방만하게 행사할 때 그리고 권력을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종종 저항을 하는 것 중 과연 어느 편이 인류에게 최선인가(215-216)?

이처럼 로크는 정부의 목적을 인류의 복지, 곧 인민의 생명ㆍ자유ㆍ자산의 보존에 있다고 선언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위반한 정부 권력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을 정당화한다. 로크는 이러한 목적에 따라 “입법권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143)고 선언하면서 최고의 권력인 입법권에도 일정한 한계를 설정한다.

그 한계란 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공공선의 한계’, ②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법치의 한계’, ③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동의에 의한 과세의 한계’, ④ 인민의 인가와 허가를 받지 않고 그 권력을 타인이나 기관에 양도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양도 불가의 한계’를 말한다(128-137). 따라서 입법권이 이러한 한계를 위반하면 인민은 이제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인민의 저항권이야말로 인민주권론의 맹아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민이 저항권을 발동하면 어떻게 되는가?

정치권력이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고 위임받은 신탁을 위반하게 되면, 인민은 그들 자신의 재산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저항하여 그 신탁을 철회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인민의 저항권”의 요지이다. 간단히 말해 신탁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수탁자를 선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이 그 신탁의 목적에 반해서 행동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은 당연히 권력의 신탁자인 전체 인민이라고 로크는 주장한다(227-228). 나아가 어떤 정부든 인민의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권”의 보장이라는 목적을 위반할 때는 “그런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라고 선언한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통해 후일 구체적인 실천에 옮겨진 것처럼, 로크가 말한 인민의 저항권은 단순히 상징적인 주장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먼저 로크가 옹호하는 저항권은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할 권리”(207)까지도 포함한다. 로크는 또한 인민의 저항권이 폭력적 저항도 허용한다고 주장한다(148, 220-221). 마지막으로 저항권 행사의 대상이 된 최고 권력자는 이제 인민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없는 “권력이 없는 일개 사인(私人)”의 지위로 되돌아가게 되며, “인민은 자유롭게 되어 우위에 서게 된다”라고 주장한다(145, 222). 로크의 이러한 논리는 고대 중국의 맹자가 주장한 폭군방벌론과 거의 동일하다. 맹자 역시 인(仁)과 의(義)를 떠난 왕은 필부에 불과하니 일개 독부(獨夫)를 치는 것이 가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크의 저항권 사상은 18세기에 들어와 전제적(專制的) 정부에 맞서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발발한 시민혁명의 이념적 기초로 활용되었다.

6) 종교적 관용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로크는 강제된 종교적 순응으로부터 유럽인들을 해방시키고자 관용에 대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그의 주장은 모든 교파나 국가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 핵심적 수단인 종교적 믿음이나 종교적 관행에 관한 일은 정치적 권위가 관여할 수 없다고 로크는 주장했다(던 1995, 134). 다시 말해 정부는 인간들이 영혼을 돌보는 데 있어 아무런 권위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용에 관한 로크의 주장은 오늘날 내적 신앙은 물론 외적 신앙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는 종교적 자유의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

그는 “만약 이교도가 신구약성서 모두를 의심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가 정직하지 못한 시민이라고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로크 2008, 68), 심지어 공인된 신을 믿지 않는 타 종교의 신자라도 관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교도는 물론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 역시 [오직] 종교적인 이유로 공화국으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로크 2008, 87).3 그러나 어떤 집단의 종교적 믿음이 정부의 정당한 권위와 직접 충돌하거나 무신론자의 경우는 관용을 주장할 수 없다. “반사회적인 교리, 사회해체적인 교리”와 “국가 권력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비교(秘敎)” 그리고 “어느 교회 사회에 가입하는 것 자체가 다른 군주의 보호 아래, 즉 다른 정치사회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교회 등이 전자의 범주에 들어간다(공진성 2008, 136-137).

또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 역시 “어떠한 방식으로도 관용될 수” 없는데, 그들에게는 “인간 사회를 묶는 끈인 신뢰도, 약속도, 맹세도, 그 어떤 것도 안정적이고 신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로크 2008, 79).

7) 북아메리카 대륙과 인디언에 대한 영국계 이주민의 식민주의 정당화

『통치론』에서 로크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의 발생을 개간ㆍ파종ㆍ경작ㆍ울타리 치기 등 오직 정착 농업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그 결과, 수렵ㆍ채취나 유목 활동에 종사하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관할하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부정당하고, 그 땅은 소유자가 없는 빈 땅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논리 구성 이전에 로크는 아메리카 인디언이 인류의 초기 발전 단계인 자연상태에 놓여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인디언 정치조직의 정치사회성(국가성)을 부인했다.

인디언 정치조직의 정치사회성을 인정한다면, 경작하지 않은 채 방치된 빈 땅 역시 무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국유(또는 지역공동체의 공유)에 속한다는 반론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크 당시 영국에 아무도 개간하지 않고 남겨 둔 빈 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땅은 국유(또는 공유)에 속하며, 어떤 사람이 그 땅을 개간하고 울타리 침으로써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권에 대한 이러한 이론 구성을 통해 로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영국 이주민의 식민주의적 정복과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3. 존 스튜어트 밀: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혁신

19세기에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로 부상했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1837~ 1901)는 영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은 “유일한 산업국가로서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은행”이었으며,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자유주의 역시 성숙기에 접어들어 영국인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며, 각종 진보적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물질적 번영과 사회정치적 개혁에 기초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영국인들은 “경제적ㆍ물질적 진보”는 물론 “정치적ㆍ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진보”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박지향 2007, 357). 그러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차티스트 운동 등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 자유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내각ㆍ의회 등 중앙정치는 물론 지방정부 역시 귀족과 대지주가 장악하고 있었고, 국민의 다수는 선거권을 갖지 못하는 등 여전히 “전통적, 전제적 요소들”이 정치를 짓누르고 있었다(박지향 2007, 358).

이런 상황에서 18세기 후반 이래 복음주의와 공리주의 사조가 출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했다. 복음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공리주의자들은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위한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박지향 2007, 114). 벤담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은 감옥의 개혁, 법제도의 개혁 및 정치 개혁에 진력했다. “보통선거, 대의제, 능력 있고 책임지는 행정부, 보편적 교육”을 골자로 하는 벤담의 정치 개혁안은 19세기 자유주의의 주된 정치적 과제가 되었고(박지향 2007, 117),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이를 계승하였다.

이와 더불어 밀은 여론과 관습에 기초한 다수의 전제(專制)는 물론 선거권의 확대로 인해 장차 위협이 될 수 있는 다수의 지배와 계급 입법에 관해 강한 경각심을 품었다. 밀은 자유주의자답게 기본적으로 세습귀족은 물론 무지한 대중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의정부론』에서 독립적이고 교육받은 집단이 보통선거를 통해서 또는 정부의 관료로서 국가를 통치함으로써 다수의 지배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밀은 사회적ㆍ정치적 약자인 노동계급이나 여성의 불평등한 처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등은 물론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 주장하고 지지했다. 나아가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질식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적 대의에는 깊은 공감을 보이기도 했다.

1)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 자연법과 사회계약에서 효용에 기초한 공리주의로 전환

앞에서도 논한 것처럼, 로크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자연법에 따라 정당화하고 사회계약이라는 이론적 장치를 통해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이 의지한 자연법 사상이나 사회계약론은 후일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먼저 로크의 자유주의에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자연법은 『통치론』에서 사실상 선험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바, 이는 현실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가 기초하고 있고 인간의 의무가 연역되는 (하나님의 법인) 자연법의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해 로크는 『통치론』에서 “이성, 곧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공통의 규칙과 척도”에 따라 자명한 것으로 상정한다(17). “그것[자연법]은 모든 인류의 가슴 속에 너무나 명백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8). 그러나 이는 경험적으로 참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소위 문명화된 사회의 사람이든 미개한 사회의 사람이든, 시대적 제약과 문화적 환경을 초월하여 “자신들이 신봉하는 도덕적인 원리와 사변적인 원리”에 관해 쉽게 합의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던 1995, 139).

게다가 『통치론』에서 선험적으로 제시된 자연법은 『인간오성론』에서 로크가 강력히 주장한 경험론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책에서 로크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적인 도덕적ㆍ종교적 관념들에 관한 일체의 교리를 공격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백지 상태나 다름없고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한다는 경험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론과 모순되는 선험적인 자연법 이론 이외에도 로크가 이론화한 사회계약론 역시 역사적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18세기에 들어와 흄과 칸트에 의해 통렬하게 비판받았다.

19세기에 벤담과 밀을 포함한 공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난관을 인식하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경험론에 기초한 공리주의로 변형시켰다. 따라서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유지되었지만,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벤담은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최고의 두 주인들이 지배하도록 하였다”라고 선언하면서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을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무엇을 행할까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시해주는 것은 오직 고통과 쾌락뿐”이며, 따라서 고통과 쾌락이 인간 행동의 원인이며 “옮음과 그름의 기준”이라고 덧붙인다(벤담 2013, 47).

이처럼 벤담은 인간의 지식과 도덕이 오직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믿는 철저한 경험주의자였다. 그는 신의 섭리, 자연법, 사회계약, 추상적인 미나 진리와 같은 개념을 공허한 것으로 치부하고 단호히 거부했다. 벤담에 따르면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은 오직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법이나 정치제도를 추상적인 자연권 등에 의거해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 인간에게 유용한지,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행복―고통의 감소와 쾌락의 증진―을 증가시키는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벤담은 원자론적 개인주의자로서 개별적인 인간이 유일한 실재이고, 인간의 공동체나 사회는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단지 “가공의 조직체”이며, 따라서 개인들의 총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이익이란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원들의 이익의 총합”일 뿐이다(벤담 2013, 50).

이에 따라 정부의 목표 역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효용이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생활의 기준이 되며 도덕적ㆍ자연적 권리 개념을 대체”했다(서병훈 1995, 63). 19세기 영국 자유주의가 성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당대의 역사적ㆍ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혁신하면서 집대성한 이론가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벤담과 데이비드 리카도를 친구로 둔 제임스 밀의 아들로 1806년에 런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밀은 아들을 벤담의 철학에 따라 공리주의자로 키우기 위해 고전어는 물론 역사ㆍ논리학ㆍ철학을 직접 가르치면서 자식의 영재 교육에 열정을 바쳤다. 밀은 한때 공리주의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공리주의 철학을 떠나지는 않았다.

밀은 『자유론』에서 자신의 논변을 전개함에 있어 (벤담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권리”와 같은 관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밀은 효용을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permanent interests)에 기반을 둔, 가장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정의했다(밀 2005, 32). 또한 그는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개량해서 전자보다 후자를 우월시하는, 곧 “쾌락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효용의 개념을 확대시킨 가치론적 공리주의(qualitative utilitarianism)”를 주장했다(서병훈 1995, 69).

또한 단순한 쾌락의 증진이 아니라 “인간의 발전”이라는 면을 중시하여 “개인의 지적ㆍ도덕적 발전[을] 사회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설정했다(서병훈 1995, 69). 벤담이 효용의 개인적 차원을 강조한 데 반해, 밀은 그에 못지않게 “사람의 본성 속에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오히려 기쁨을 느끼는” 효용의 사회적 차원도 중시했다.

이 점에서 밀은 개체성과 사회성을 조화시키면서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개인의 행복으로 정의했다(서병훈 1995, 81). 전체적으로 밀의 공리주의는 개인 자신의 행복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복도 포함하여 “모두의 행복 전체를 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서병훈 1995, 78-79).

밀은 이처럼 확대된 효용과 행복을 도덕 이론의 궁극적 기준으로 삼았다.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 이론[공리주의]은,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강조는 원문). 물론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밀 2007, 24). 밀은 『공리주의』의 마지막 장에서 종래 “사물의 어떤 내재적 성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 정의 개념 역시 “편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밀 2007, 89). “나는 효용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정의에 관한 가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을 반박하는 한편,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어느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도 강하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밀 2007, 118).

예를 들어, “상호간 해를 끼치는 것(특히 타인의 자유에 대해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도덕 규칙은, 인간사의 일정 영역에 대해 잘 관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만 가르쳐주는 그 어떤 격률 …… 보다 인간의 복리[사회적 효용]를 위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밀 2007, 119). 밀의 이러한 공리주의가 자연법에 기초한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부정한 것은 당연하다. 밀은 사회적 의무의 근거로서 사회계약론을 부정하고 대신 공리주의적 의무관을 제시한다.

사회는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적 의무의 근거를 끌어내기 위해 계약론을 거론해보아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렇기는 하나, 사회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갚아주어야 한다. 또 사회 속에서 사는 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 일정한 행동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밀 2005, 141).
이처럼 밀의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철학적 토대를 자연법과 사회계약에서 효용에 기초한 공리주의로 전환시킨다.

2) 자유에 대한 주된 위협의 변화: 정치적 절대주의에서 여론과 관습에 기초한 다수의 전제(專制)로

영국에서 17세기 내내 내전과 혁명을 통해 폭발한 격렬한 정치적ㆍ종교적 갈등은 명예혁명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이후 영국 정치는 정치적 절대주의의 폐지, 귀속적 신분제도의 철폐, 종교적 관용의 성취를 통해 초기 자유주의 과제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역시 근대 서구 문명 내에서 영국발(發) 자유주의의 전반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하기 시작한 밀 역시 『자유론』에서 초기 자유주의 과제가 성취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먼저 과거 자유주의가 “정치권력자의 압제에서 보호”받기 위해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규정”하는 데 몰두했는데(밀 2005, 17, 18), 이제 이러한 목표는 시민의 인권 보장, 의회제도의 확립 및 선거를 통한 지배자의 선출을 통해 달성되었다고 평가한다(밀 2005, 18-19). 이어서 그는 “정치나 철학 이론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할 때는 결점이나 허점들이 눈에 띄지 않다가 성공을 거두면 발견되곤 한다”(밀 2005. 20)고 하면서 현실의 변화에 비추어 초기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운영에서 일정한 문제들(puzzles)이 발생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자유주의의 과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그는 권력의 횡포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경계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이제 “다수의 횡포”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다수의 지배를 상정하는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횡포는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해악(계급 입법 등)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개별 구성원들에게 집단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폐해 역시 심각하다고 주장한다(밀 2005, 22). 그는 이 논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처럼 사회가 그릇된 목표를 위해 또는 관여해서는 안 될 일을 위해 권력을 휘두를 때, 그 횡포는 다른 어떤 형태의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한 것이 된다. 정치적 탄압을 가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웬만해서는 극형을 내리지 않는 대신,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밀 2005, 22). 사회의 이러한 횡포가 구성원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말살하고 “모든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사회의 표준에 맞도록 획일화”를 강요한다는 것이다(밀 2005, 23).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론』의 서두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함으로써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선언한다(밀 2005, 30). 이어서 그는 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self-protection)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밀 2005, 30).

이러한 원칙에 따라 밀은 개인의 삶에 관한 선의의 간섭이나 개입―해당 개인의 “물[질]적 또는 도덕적 이익(good)”을 위해 간섭하는 것, 그 개인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간여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외부 행위자(또는 집단)의 판단에 따라 해당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하는 행위 등―을 자유의 침해라고 주장한다(밀 2005, 30). 이러한 주장은 이제 자유의 주적(主敵)이 국가(정치권력)라기보다는 사회, 곧 다수의 횡포라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밀은 자유로운 사회가 정부 형태와 상관없이 세 가지 자유를 원칙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세 가지 자유란 ① 인간의 내면적 의식과 관련된 양심ㆍ사상ㆍ종교ㆍ학문ㆍ의견의 자유와 이를 표현하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 ②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 ③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밀 2005, 34-35).

『자유론』에서 밀은 다수의 횡포가 사회를 통해 관철되는 기제인 관습과 여론에 의한 자유의 억압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먼저 “관습은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행동 규칙의 타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리하여 그 타당성에 대한 “이성적인 토의”를 자연스럽게 금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밀 2005, 24). 마찬가지로 밀은 여론의 횡포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여론을 빌려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 만일 그[억압된] 의견이 옳다면 그들[인류]은 오류를 버리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틀린 의견과의 충돌을 통해 진리를 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는 대단히 커다란 이득을 놓치는 셈이 된다(밀 2005, 42; Mill 1956, 21, 영문본에 비추어 번역 약간 수정).

여기서도 밀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효용에 기초한 공리주의적 논변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이제 우리는 정치 지배자의 폭정에 저항하여 신민의 자유를 방어하는 자유주의 1.0 버전이 이제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개별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2.0 버전으로 자유주의 패러다임이 혁신되어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논변 역시 추상적인 자연법과 사회계약에서 경험주의적인 공리주의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3) 의회중심주의에서 대의정부론으로

앞에서 로크가 입법권의 최고 우월성을 주장하고 의회중심주의를 천명했다는 점을 논한 바 있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밀은 이미 로크 사후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영국 의회제도의 운영과 관련된 이론과 관행을 염두에 두고 『대의정부론』을 통해 자신의 민주주의 사상을 전개했다. 밀은 먼저 과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공공 문제를 토의하고 여론을 형성”할 수 없다는) 물리적 제약 조건 때문에 “단일 도시국가의 경계를 넘어 제도화된 민주 정부 같은 것”을 구축할 수 없었는데, “이제 대의제가 그와 갈은 걸림돌을 제거”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밀 2012, 16).
그는 대의정부를 “인민이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로 규정한다. “대의정부는 전 인민 또는 그들 중 다수가 주기적 선거에서 뽑은 대표를 통해
최고 통치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 형태이다”(밀 2012, 91). 그는 “한 나라의 정치제도”가 “좋은 자질을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조직할수록 좋은 정부”가 된다고 언급하면서, 대의정부가 문명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고 주장한다.8 “대의정치 체제는 다른 그 어떤 조직보다도 한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능력과 정직함의 수준을 잘 반영”하고, “특히 지성과 덕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정부 안에서 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밀 2012, 39).

물론 개인의 지적ㆍ도덕적ㆍ감정적 자기 발전을 행복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자유를 강조한 『자유론』의 주제와 부합하게 그는 좋은 정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사회 구성원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도덕적ㆍ지적ㆍ능동적 능력을 활용해서 사회의 당면 문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있는가? 둘째, 사람들의 그러한 능력을 얼마나 발전 또는 퇴보시키는가?”(밀 2012, 60).

이어서 밀은 “가장 이상적인 정부”를 “작동하기에 적합한 환경 속에서 지금 당장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유익한 결과를 최대한 낳는 정부”로 규정하면서 “완벽하게 민주적인(popular) 정부가 바로 이 같은 규정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라고 규정한다(밀 2012, 60). 이 점에서 우리는 로크가 좋은 정부를 인간의 생명ㆍ자유ㆍ재산을 보존하고 국가의 안보 등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소극적인 관점에서 규정한 데 반해, 밀은 좋은 삶과 좋은 정부에 대한 공리주의의 철학에 기초해서 대의정부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대의정부론』에서 특기할 만한 주장을 간략히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밀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통상 ‘다수의 지배’로 이해하는 것에 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밀은 제7장에서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참된 민주주의”와 “다수파만을 대표하는 거짓 민주주의”를 구분한다. 그는 “순수한(pure) 의미의 민주주의는 평등하게 대표되는 전체 인민(whole people)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를 지칭”하는 데 반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민주주의는 특정 집단만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그저 다수파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후자가 단지 “다수파를 이롭게 하는 특권 정부”일 뿐이라고 비난한다(밀 2012, 134). 이와 관련하여 밀은 “다른 모든 정부 형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악한 이익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민주주의에 내재한 가장 큰 위험 중의 하나”라고 강조한다(밀 2012, 131). 이른바 다수의 지배로 상정되는 민주주의도 이러한 폐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는 “똑같은 계급으로 구성된 다수파 사람들이 자기 당파적 이익에 따라 계급 입법을 시도”하기 때문이다(밀 2012, 133).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반드시 “그 수에 비례해서 대표자”를 내고 다수파와 마찬가지로 “소수파도 그에 비례해서 적으나마 대표”를 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그렇지 않다면 평등한 정부가 아니라 불평등과 특권이 지배하는 정부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밀 2012, 135). 극단적인 경우에 “선거에서 진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유권자들은 그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밀 2012, 136).

마지막으로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유권자가 상당하고, 득표율에 따라 다수파(여당)와 소수파(야당)가 형성되고 그 다수파 내에서도 다양한 분열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궁극적으로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여론이 전체 국민의 소수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점을 밀은 강조한다(밀 2012, 136-137). 따라서 밀은 “소수파도 적절하게 대표되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핵심 원리”이자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역설하면서 대표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한다.

그는 『대의정부론』 제7장에서 특히 토마스 헤어(Thomas Hare)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혁안―현대 정치에서 선호이전식 투표제로 알려진 선거제도―을 상세히 소개ㆍ검토한 후, 이를 강력하게 추천한다.9 나아가 밀은 “비록 다수파에 수적으로는 밀리더라도 소수파가 자신이 이해관계와 생각ㆍ지성을 드러낼 기회를 가지고, 나아가 수적 열세를 뛰어넘어 인격의 무게와 논리의 힘에 의해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런 민주주의만이 진정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밀 2012, 163). 따라서 “대학 졸업자”, “고등학교 과정” 이수자, “전문 직업 종사자” 등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더 많이 주는 복수투표제를 제안한다(밀 2012, 178). 이는 보통선거권이 확대된 후, 교육 수준이 낮은 육체노동자 등이 수적 우위를 활용해 계급 입법을 도모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대의정부론』에는 민주적 요소와 엘리트 지배를 융합시키려는 밀의 독특한 사상이 반영돼 있다. 밀은 “국가의 실질적 최고 권력”이 “인민의 대표”인 “대의 기구”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정부 일을 통제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밀 2012, 93).

이어서 대의민주주의와 관료제의 장단점을 검토하면서 밀은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기구가 최종 결정권을 보유하고 실제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지적 전문성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업무를 맡아 처리함으로써 최대한 효율을 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논한다(밀 2012, 120). 다시 말해 대의 기구는 정부 인사의 임면(任免), 실제 집행된 정책에 대한 승인이나 문책을 통한 감사 등 주로 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에 전념하고 통치와 관련된 실질적 업무는 정부나 특별 위원회가 담당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입법의 경우에도 법률안의 작성 등은 정부나 특별한 위원회가 주로 담당하고 의회는 상정된 법안을 토론ㆍ심의하고 통과시키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밀 2012, 103-104).

이 과정에서 인민의 대표인 의회는 “민의를 적절히 대변하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바(밀 2012, 104), 이를 위해 “국민의 불만 사항을 듣고 취합하는 고충위원회(Committee of Grievances)[의] 역할과 각종 여론을 종합하는 국민여론위원회(Congress of Opinions)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밀 2012, 107). 따라서 밀은 대의 기구 내에서 일어나는 토론과 설득을 통한 숙의를 중시한다. 이처럼 인민의 대표가 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한편, “지적 전문성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정부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밀의 대의정부론을 서병훈은 “숙련 민주주의”로 규정한다(서병훈 2012, 343). 마지막으로 밀은 『대의정부론』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밀은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이란 “정치적 권리와 무관한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 여성 역시 좋은 정부에 이해관계가 있고 또 자신의 이익을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 여성 역시 “생각하고 글을 쓰며 가르치는 일”을 함에 있어서 남성과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여성들도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밀 2012, 181-185).

1865년 초에 웨스트민스터의 몇몇 유권자들에 의해 의원 출마를 권유받았을 때, 밀이 출마의 전제 조건으로 매우 까다로운 자신의 입장이나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보낸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거기에서도 밀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선거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포함시켰다(서병훈 2005, 217).

따라서 의원으로 선출된 후 1867년 선거법 개정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을 때, 밀은 자신의 본래 입장에 충실하게 여성 참정권을 포함시키는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소수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박지향 2007, 124). 오늘날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밀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와 같은 비판에 논리적 타당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인해 당대에 온갖 조롱과 멸시를 감수하면서 밀이 남성과 동등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4) 종교적 관용: 소극적 관용을 넘어 적극적인 종교적 다원주의로

앞에서 로크가 정부의 정당한 권위와 직접 충돌하는 종교적 신앙을 가진 집단들(가톨릭교회 등)이나 무신론자들을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했다는 점을 논했다. 로크가 무신론자를 관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신론자가 “어떠한 두려움의 대상도 없으며, 따라서 그 대상을 두고서 어떠한 맹세도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와 어떠한 계약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공진성 2008, 136). 이에 대해 공진성은 로크가 사회계약의 체결과 유지에 필수적인 신뢰의 궁극적 기반을 종교에서 찾았고, 그 결과 무신론이 종교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불가능할 정도로 반사회(계약)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공진성 2006, 136, 168 주 83).

공진성은, 그러나, 상황이 바뀐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물론 무신론 역시 “더 이상 정치사회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하지도 않으며 국가와 교회의 구분을 파괴하지도 않기 때문”에 로크가 전개한 관용론이 이들을 관용의 대상에서 배척할 이유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본다(공진성 2008, 137). 로크의 관용론은 국가(정치)와 교회(종교)의 구분에 기초해서 각 영역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시민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교회는 영혼의 구원에 전념하고, 국가는 개인의 생명ㆍ자유ㆍ재산을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록 로크가 관용의 대상에 이슬람교도나 유대교 역시 포함시켰지만, 17세기 말 로크가 관용론을 전개한 주된 배경인 유럽 사회가 다양한 교파 교회로 분열된 기독교 사회였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관용론은 한 정치사회에서 다수를 형성하는 교파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 소수파 교파를 탄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다분히 소극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톨러레이션(toleration)이라는 단어의 원뜻이 지시하듯이, 그것은 어떤 한 교파가 다른 교파들을 진심으로 환영할 것을 주문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다른 교파들의 존재를 ‘참다’, ‘용인하다’, ‘견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세속화가 한층 더 강화된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밀 역시 관용과 관련된 주제를 『자유론』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다. 관용에 관한 밀의 논의는 『자유론』에서 전개된 자신의 심화된 자유 개념에 맞게 로크 관용론의 기본 취지를 재해석하여 계승하는 한편,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영역으로 사회적 관용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이는 그의 자유론이 정치권력의 횡포보다 사회적 다수의 횡포를 주된 대상으로 전개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나아가 밀은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본질적 우월성을 부정하고 타 종교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옹호함으로써 단순한 관용을 넘어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먼저 밀은 『자유론』에서 “내면적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과학ㆍ도덕ㆍ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옹호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포함한) 종교적 교리에 관해서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밀 2005, 34).

나아가 외부적인 행동의 영역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종교적 자유는 무제한 허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밀이 살고 있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언행을 한 사람이 처벌받거나 무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배심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사건 등이 발생했고 밀은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밀 2005, 64).

그러나 밀은 이런 사건들을 “장차 박해를 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박해가 남긴 추한 흔적이나 잔재”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밀은 이제 정치와 종교의 분리 및 정치사회에서 시민적 평화의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 무신론을 포함한 종교의 자유를 개인의 절대적 자유라는 측면으로 확장하여 옹호한다. 이 점에서 로크의 관용론은 밀에 의해 그 정당화 논리가 무신론을 용인할 정도로 혁신되고, 그 외연 역시 무신론을 수용할 정도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밀은 여론과 관습을 매개로 해서 일어나는 다수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 『자유론』의 기본 주장에 합당하게, 단순히 법적ㆍ정치적인 관용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적인 불관용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밀은 비록 다수의 사람들이 법적인 처벌이나 박해를 표면상 주장하지 않지만―공적ㆍ정치적 관용이라는 ‘표정 관리’―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을 부인하는 자들(소수 교파, 이단자, 무신론 등)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정신의 자유를 잠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밀 2005, 66).

이로 인해 소수파들은 사회적 불관용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게 된다(밀 2005, 67). 그 결과 이론가나 지식인들의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사유가 억압당하고, “거대한 규모의 정신 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피해는 소수의 “위대한 사상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 타고난 능력만큼 정신적인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밀 2005, 70). 나아가 밀은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교리,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체계화한 그리스도교 도덕을 긍정적으로는 물론 비판적으로 개관하면서, 그리스도교 도덕에 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품고 있는 우월성에 일침을 가한다. “그[그리스도교] 도덕이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불완전하고 일방적이며, 따라서 그것과 다른 입장의 생각과 감정이 유럽인들의 삶과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다면, 우리 삶이 지금보다 못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으리라고 주저 없이 말해두고 싶다”(밀 2005, 96).

그러고 나서 종교적 다원주의가 도덕의 발전을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은 물론 인류의 도덕적 쇄신을 위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둔 윤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띤 윤리 체계도 인류의 도덕적 쇄신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 정신이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한, 그리스도교적 신앙도 다양한 의견을 허용해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속에 포함되지 않은 도덕적 진리를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리스도교 속에 담긴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밀 2005, 98).

관용에 대한 로크와 밀의 사상을 현대 서구에서 출현한 다문화주의에 비유해본다면, 로크의 관용론이 주류 문화(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전제로 정치사회의 평화를 위해 소수 집단의 문화적 차이(종교적 차이; 여기서는 이슬람교, 유대교 등을 지칭)를 용인하는 소극적 다문화주의라면, 밀의 관용론은 주류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의 혼융과 이종교배를 통해 풍성한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에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5) 밀의 “선의의 제국주의”: ‘빈 땅’ 정복하기에서 ‘문명화’의 사명으로

로크와 마찬가지로 밀 역시 『자유론』과 『대의정부론』에서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로크의 경우에는 광활한 땅에 인구밀도가 희박한 북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서 인디언을 몰아내고 빈(?) 공간을 채우는 식민주의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경작과 울타리 치기 등 오직 농업 노동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논변을 전개함으로써 영국계 이주민의 토지 침탈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밀의 시대에 영국의 식민주의는 이제 인구밀도가 높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정복해야 했기에 새로운 철학적 정당화를 필요로 했는데, 동인도회사의 관리로서 근무를 했던 밀은 이 철학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밀 역시 근대 유럽의 선배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문명화된 유럽 사회는 “자유의 원리”가 지배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밀 2005, 32). 그러나 비유럽 사회는 모두 후진적이며, 유럽의 식민 통치를 통해서만 진보를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인도, 중국 및 동양 전체가 처음에 출발은 좋았지만(밀 2005, 132), 관습의 전횡이 극에 달해 “자유, 진보, 개선의 정신 같은 것”을 가로막아왔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역사”가 없이 정체 상태에 놓여 있었고, 스스로 문명 상태로 나아갈 전망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밀 2005, 131).
그 결과 후진적 사회는 유럽 문명이 도달한 대의정부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 우월한 민족이나 발전된 사회 상태에 속하는 외국인들의 지배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외국 정부의 지배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타개할 수 없는 고질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고 여러 단계의 과제를 압축적으로 이행(履行)함으로써 문명 상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밀 2012, 84).

후진적인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밀의 논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밀의 주장과 전반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논한 것처럼 먼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밀은 개인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으로 “자기 보호(self-protection)를 위해 필요한 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때를 든다. 따라서 선의의 간섭이나 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밀 2005, 31).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the maturity of their faculties)”에게만 적용된다. 따라서 “아직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어린아이나 미성년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외부의 위협 못지않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밀 2005, 31).

미성년자와 마찬가지로 장기적으로 정체 상태에 놓여 있는 후진적인 상태의 사회 역시 선의의 간섭이나 개입을 배제하는 자유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성인인 부모가 하는 것처럼 문명 상태에 도달한 외국 정부에 의한 선의의 전제정치(despotism)가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된다(밀 2005, 32).

따라서 밀의 주장에 따르면, 공동체의 차원에서 타국의 개입을 배제하는 영토적 불가침성과 자결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문명이 발전한 유럽 국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후진적인 사회는 그러한 권리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정치나 귀족정치, 특히 생시몽식 사회주의를 닮은 체제”가 필요하다(밀 2012, 45).

[어린애의 걸음마를 익힐 때 부모가 사용하는] “보호용 목줄이 끄는 정부라고 부를 수 있을 이 체제는 그런 민족들을 다음 단계의 사회적 진보로 가장 빨리 끌어올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다”(밀 2012, 46; Mill 1972, 199, 원문 참조하여 번역 다소 수정). 결론적으로 후진적인 비유럽 사회는 유럽 국가가 파견한 식민지 관료에 의한 ‘선의의 그러나 강력한 전제정치’로 통치되는 것이 문명 상태에 이르는 (그들의) 장기적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변으로 밀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한다(밀 2012, 317-22). 다시 말해,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내세운 ‘문명화의 사명’을 통해 밀은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4. 마치며 :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창조와 혁신 을 중심으로 본 로크와 밀의 사상

결론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두 사상가의 기여와 한계를 본문의 논의를 중심으로 간략히 요약하는 한편 서술의 편의상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을 추가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서구 정치(사상)사에서 홉스ㆍ로크ㆍ루소가 발전시킨 사회계약론의 기여를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역사적으로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저항권 사상과 함께 종교적ㆍ시민적ㆍ정치적 자유를 촉진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둘째 사상사적으로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연권을 누린다고 주장함으로써 천부 인권사상을 최초로 제공했다.

오늘날 국가나 사회의 존재 이유를 구성원인 개인의 생명ㆍ자유ㆍ재산의 보호라는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비판하는 보편적 인권 사상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셋째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오늘날 거의 보편적인 정치체제로 정착한 자유민주주의―그것이 갖는 긍정적ㆍ부정적 의미를 망라하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크의 저항권 사상에서 인민주권론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로크는 “주권의 본질이나 소재에 관해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된다(바커 1995, 34).14 또한 로크가 제시하는 정치사회의 초기 값은 남성 유산계급을 표준으로 설정하고 있어서 여성은 물론 노동자 등 무산계급을 정치사회에서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로크가 여성은 물론 무산계급의 참정권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로크의 의회중심주의 논변이나 저항권 사상도 그가 속한 남성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로크 정치철학에 담긴 이러한 비민주적 결함을 극복하고 자유주의를 혁신하는 작업은 후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런 과제를 물려받은 밀은 인민주권론을 명실상부하게 확인하고, 노동계급은 물론 여성을 포함시킨 보통선거권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했다.

나아가 『자유론』에서는 정치 영역에서 전제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사회 영역에서 다수의 횡포로부터의 자유로 확장하여 전개함으로써 정치적 자유주의에 사회적 자유주의를 추가하였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심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로크는 입법권의 최고성과 입법권과 집행권의 권력 분립을 주장했지만, 양자의 명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로크 사후 100여 년 이상 진행된 영국 헌정 체제의 운영과 관련된 이론적 발전과 실천적 경험에 기초해 의회와 행정부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는 한편, 보통선거권의 도입이 가져올 다수의 횡포에 대비해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를 조화시키는 대의정부론을 체계화했다.

종교적 관용에 있어서도 밀은 로크처럼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상호 분리와 불간섭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사회 내에서 다수가 저지르는 사회적 불관용을 타파할 것은 물론 종교적 다원주의를 주장하여 과거의 관용론을 심화ㆍ확충했다. 마지막으로 로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전개된 영국의 식민주의를 농업자본주의를 기초로 정당화했는 데 반해, 밀은 진보의 이념에 따라 역사 발전 단계를 설정하고 후진적인 사회 상태에 있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를 자유주의의 문명화 사명으로 정당화했다. 요컨대 밀은 이론적 필요와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로크가 창시한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확장ㆍ심화하고, 또 필요에 따라 민주화함으로써 적절히 쇄신했고, 이러한 그의 작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로크는 이미 자연상태에서 화폐경제의 도입을 상정함으로써 개인의 사적 소유(재산)의 무제한적인 확장과 그 산물인 불평등한 소유와 분배를 용인했다. 나아가 이를 사회계약을 통해서 정당화함으로써 근대 초에 부상하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적극적으로 복무했다는 비판이 따른다(Macpherson 1962). 로크와 달리 밀은 인간의 경제적 불평등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했다. 밀에게 “불평등은 그 자체로서 죄악이다.” 왜냐하면 “불평등은 사람의 육체적ㆍ정신적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서병훈 1995, 381에서 재인용; 강조는 원문).

이에 따라 밀은 “부의 생산은 자연적 ‘경제 법칙’에 따라서 결정되지만 부의 분배는 사회적 문제,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누진세를 통한 부의 분배, 보편적 교육,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 등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박지향 2007, 123-124). 그러나 그는 노동자 계급의 빈곤 등 사회적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우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서병훈 1995, 387), 사유재산과 자유경쟁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서병훈 1995, 388-391).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개혁에 대한 밀의 관심은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다. 자유주의 패러다임 내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은 자유의 주된 장애물로 “빈곤ㆍ질병ㆍ편견ㆍ무지”를 지목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 권력의 능동적인 역할을 촉구했던 토마스 그린(Thomas H. Green)과 같은 복지 자유주의자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볼, 테렌스ㆍ대거, 리차드. 2006, 143-145).

그런데 로크와 달리 밀의 사상에서는 저항권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러한 ‘침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패러다임의 혁신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추론을 해본다면, 당시 빅토리아 영국이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운영프로그램으로서 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으며, 실제로 선거를 통한 보수당과 자유당의 주기적 정권 교체를 통해 저항권 행사가 ‘준’제도화되었기 때문에 밀의 사상에서 저항권에 대한 논의가 부재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 전반 영국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차티스트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고 또 정부에 의해 탄압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전체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통한 선거권의 획득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에 집중되었다―쿤의 용어에 따르면, 자유주의 패러다임 내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 풀이(puzzle-solving)를 제기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요구 사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그 급진적 전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밀 역시 전체적으로 노동자의 보통선거권을 지지하면서도, 노동자가 다수가 되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계급 입법을 할 것이라는 우려를 강하게 표명했을 뿐이고, 노동자 계급에 의한 급진적 혁명의 발발은 염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저항권에 대한 관심이나 논의가 적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가 영국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시대에 그 패러다임을 혁신한 밀의 사상에서 저항권에 대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15 이 글의 주제인 패러다임의 창조와 혁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패러다임의 창조자(창업자)로서 로크는 절대왕권이라는 패러다임을 전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관철시키기 위해 저항권에 대한 적극적 사유가 필요했던 데 반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보수[補修](수성)하고 쇄신(경장)하는 데 관심을 가진 밀은 저항권에 대한 사유를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없었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를 정당화함에 있어서 밀이 시도한 철학적 기초의 전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결론을 마치겠다. 로크가 자유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와 이론적 장치로 호소한 자연법과 사회계약은, 비록 직관적인 호소력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18세기에 들어와 경험적 근거 및 역사적 실재성과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19세기에 활약한 벤담은 물론 밀 역시 공리주의자로서 자연법 사상과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취약점을 인식하고, 그 대안을 효용에 기초한 공리주의에서 찾았다. 그런데 공리주의 철학이 로크의 자연법 사상이나 사회계약론보다 경험론에 더 정초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서병훈이 논하는 것처럼, 사물에 내재한 기치에 기초한 쾌락(가치)의 객관성이나 쾌락(가치)의 위계성에 대한 밀의 주장이 단순한 직관주의적인 설득력(plausibility)을 넘어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지는 의문스럽다(서병훈 1995, 59-79).

이 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간단히 논해보면, 예를 들어 밀은 『공리주의』에서 쾌락의 질적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똑같이 잘 알고, 그 둘을 똑같이 즐기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다 높은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특정 삶의 방식을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밀 2007, 27).

그러나 밀의 이러한 논변은 심각한 반론과 의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밀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을 선택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밀 자신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선뜻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가 궁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밀은 “지성”, “교양”, “감정과 양심”을 가진 사람, 아니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 등 일정한 부류의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바보”이거나, “무식한 사람”, “이기적이고 저급한 사람”, ‘타고난 능력이 열등한 존재’로 격하해버린다(밀 2007, 27-28).

그렇다면,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왜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을 선택할까? 그 이유로 밀은 “자존심”, “자유와 개인적인 독립성에 대한 사랑”, “권력이나 흥분 상태에 대한 사랑”,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품위(sense of dignity)” 등을 언급한다(밀 2007, 28). 이러한 이유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생략하고 밀의 논리를 단순히 전도시켜보면,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위에서 제시한 요소들이 결여된 ‘불완전한’ 또는 ‘저급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그런 부류의 사람은 밀이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던 논리에 따라 일종의 ‘미성년’으로서 밀이 주장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고, 성인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자유를 누릴 지적ㆍ도덕적 자질을 갖춘 성숙한 인간의 후견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밀의 공리주의 철학은 밀이 제시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는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철학인 것으로 판명된다. 결론적으로 밀이 제안한 공리주의 철학 역시 직관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고 또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지 의문스럽다.

지금까지 패러다임의 창조와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로크와 밀의 자유주의ㆍ민주주의 사상을 대조하면서 검토했다. 검토를 위해 대조의 기본적 프레임(틀)을 자유주의의 고전적 과제인 “정치적 절대주의”, “귀족주의적 특권” 및 “종교적 순응”의 폐지 그리고 자유주의와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두 사상가의 기여와 한계를 검토하면서 밀의 사상 전개에 관찰된 저항권에 대한 침묵 및 철학적 토대의 공리주의로의 전환을 비판적으로 음미했다. / 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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