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전문] 남순건 교수 '가모브와 이휘소, 우주론과 표준모형'
[네이버 열린연단-전문] 남순건 교수 '가모브와 이휘소, 우주론과 표준모형'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8.2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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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 : 문화의 안과 밖’의 8월 19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2섹션 과학/과학철학의 마지막 열한 번째 강연으로 남순건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의 '가모브와 이휘소, 우주론과 표준모형'을 주제로 진행됐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남순건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물리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MIT, 버지니아폴리테크닉주립대, 서울대에서 박사후연구원, 미국 하버드 방문교수,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 등을 지내고 현재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스트링 코스모스』 등이 있고 『정확히 풀리는 양자계』 등을 공저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

1. 들어가며

우리나라는 과거에 천문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천상열차분야지도만 보더라도 그렇다. 또한 케플러의 별이라 불리는 초신성도 사실 조선 시대에 관측을 더 잘해놓았고, 그 기록만 가지고도 이것이 어떤 유형의 초신성임을 현대 천체 물리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잘 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과거에는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시아에서 그런 경향이 크고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의 과학자를 2등으로 여기는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이런 한국에서 과학자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과학에 대한 부정확한 시각 때문에 때론 어렵고 마음껏 연구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에 때론 마음고생을 하게 한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첫사랑을 지금까지 유지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행운이기도 하다. 내가 과학자의 길, 특히 우주와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하게 운명을 바꿔놓은 두 과학자의 삶과 그 업적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적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남순건 교수

개인적으로 평생의 운명을 바꿔놓은 두 과학자의 이야기 - 가모브와 이휘소

인문 사회과학 등의 다른 학문과 달리 물리학에서는 물리학자의 삶에 대해 그다지 많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서 과학자의 삶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물리학이다.

지난 세기의 물리학의 발전이 수천 년간 이어오던 우주와 물질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새로 바로잡아주었고, 우리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그 발전에 의한 혜택을 엄청나게 주었기에 이런 발전에 기여한 물리학자들의 삶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물리학자의 삶에 대해 읽더라도 자신의 삶에 이를 반영하기는 어렵다. 시대와 환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모브(1904-1968)와 이휘소(1935-1977)는 필자에게 남다른 영향을 미쳤다. 이 두 학자의 삶과 죽음이 필자에게는 직접적으로 다가왔었다.

우선 가모브는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책들을 많이 저술했다. 다른 책들이 많지 않던 1970년대 중반 전파과학사의 현대 과학 신서는 당시 과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즐겨 읽던 문고판 책이다. 100권이 넘는 책이 당시 최고 권위의 교수들에 의해 저술되거나 번역되었다. 물리학과 관련된 것은 책방에서 발견되는 대로 거의 다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정보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아마도 물리학자가 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고판에서 가모브의 책들을 읽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원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그의 입담이 그의 책을 한번 잡으면 놓지 못하게 하였고 그만큼 우주에 대해 자신의 빅뱅 이론을 풀어나간 그의 책은 소중하게만 다가왔다.

특히 『우주의 창조』라는 가모브의 책은 당시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충분하였다. 광대한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휘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1977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열심히 대학 입시 공부를 할 때 신문 사설을 읽는 것도 시험 준비의 하나였는데 6월 어느 날 신문에 재미 물리학자인 이휘소의 교통사고 소식이 난 것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대학신문》에 그를 기념하는 워크숍이 서울대에서 개최되어 노벨상 수상자들이 다수 왔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쿼크와 게이지 이론이란 당시로서는 생소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그날부터 입자물리가 뭔지 알고자 하여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2. 가모브의 우주론

우주에 관해서는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무한히 큰가 아니면 유한한가? 우주는 얼마나 큰가? 우주는 시작이 있었는가? 시작이 있었다면 우주의 나이는 얼마인가? 우주에 들어 있는 물질, 즉 원소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 원소들이 어떻게 지금의 우주의 모습을 만들었는가?

꼬리를 무는 질문이 있게 마련이다. 우선 ‘우주의 크기는 무한한가? 우주는 유한한 과거에 시작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살펴보자. 이에 대해서는 1823년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1758~1840)의 질문이 중요하다. 그는 만약에 우주가 무한히 크고 무한히 오래되었고 무한히 많은 별이 우주에 있고 별의 표면에서 나오는 빛이 대략 태양과 유사하다면 밤하늘은 어두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무한히 먼 곳의 무한히 많은 별들로부터 오는 별빛이 모이면 밤하늘도 무한히 밝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올베르스의 역설이라 부른다. 이의 해결책으로 올베르스는 별빛은 별 사이에 있는 가스에 별빛이 흡수되어 지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올베르스 역설에 대해 성간 물질의 흡수보다는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지구에 도달하지 않은 별빛이 많은 탓이라고 생각한 매들러가 있었다.

이러한 매들러(1794-1874)의 생각은 유한한 과거에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우주관에 가까웠고 오히려 당시의 천문학/물리학계의 주류의 생각과는 어긋났다.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1848년 미국의 소설가 및 시인인 에드거 앨런 포(1809-1849)가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였다.
‘물질의 완전히 간단하고 완벽하게 독특하고 나뉘지 않은 특이점 상태로부터 우주가 폭발하면서 나타났다’라고 「유레카(Eureka)」라는 시에서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우주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연구는 아인슈타인(1879-1955)의 중력에 대한 이론인 일반 상대성 이론이 1915년 완성된 후에 가능해졌다. 유한한 속도의 빛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이 일반 상대론이기 때문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앞선 이필진 교수의 강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우주 전체에 적용해서 시공간의 변화를 계산한 최초의 사람은 알렉산드르 프리드만(1888-1925)이다. 1차 세계 대전에 러시아/소련 군인으로 전쟁을 치른 프리드만은 1922년 「공간의 곡률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썼는데, 여기서 우주의 곡률이 양, 음, 영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풀었다. 특히 우주의 곡률이 양일 경우는 우주가 시작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모형이 되었다. 즉, 무한히 작은 한 점에서 시작하는 우주의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최초로 푼 것이다.

우주가 어느 방향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우주 공간 어느 곳에서 관측해도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프리드만이 푼 결과였다. 그는 우주가 정적일 수 없음을 보였다. 불행히도 1925년 프리드만은 장티푸스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프리드만의 지도를 받으려 레닌그라드 대학 박사 과정에 진학한 가모브는 제대로 그의 지도를 받지는 못하였다.

가모브와 핵물리학

조지 가모브는 1904년 3월 4일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는 오데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 서재의 책상 위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책에 둘러싸인 환경이어서 수많은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나중에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오데사의 분위기는 러시아 다른 도시들과는 많이 달랐다. 러시아 교역의 중심지인 항구 도시로서 다양한 사람들, 그리스, 중국,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할아버지와 러시아어를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아버지가 있었다.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거쳤으나 1913년 어머니의 사망, 그리고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 혁명 등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더구나 혁명 정부의 무분별한 정책 등에 의해 1921년 소련의 경제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과 푸시킨(1799-1837)의 시를 좋아했던 가모브는 1922년 오데사 대학의 물리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대학의 상황은 최악이었고, 가모브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가모브가 레닌그라드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는 것을 돕는다.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가모브는 4살 연하이나 같은 박사 과정에 있던 란다우(1908-1968,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동년배인 이바넨코(1904-1994)와 같이 지도 교수 없이 공부를 하였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을 슈뢰딩거의 논문으로 공부하기도 하였고, 이바넨코와는 5차원 중력 이론인 칼루차-클라인 중력 이론으로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는 이론 분야의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가모브는 1928년에 3개월간 괴팅겐 대학에 가서 연구할 장학금을 받아 독일에 가게 된다. 독학으로 훈련된 그는 도서관에서 러더퍼드(1871-1937, 1908년 노벨 화학상 수상)가 금박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킬 때 뒤로 튀어나오는 알파입자가 있다는 실험을 통해 원자핵의 존재를 밝힌 1909년의 논문을 읽게 되었다. 이 실험은 노벨상 수상 이후에 한 실험이다.

한편 1928년경에 러더퍼드는 무거운 핵에서 자발적으로 알파입자가 나오는 현상 즉 알파 붕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당시 이 설명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핵 속의 전자가 알파입자와 같이 나온 후 다시 핵 속으로 들어간다는 직관적 설명이었다. 당시 이미 완성되어 있던 양자역학을 쓴 설명이 아니었다.

이때에 가모브가 원자핵이 알파입자에 대한 양자역학적 퍼텐셜을 만들고 이 퍼텐셜에서 알파입자가 나온다는 모형을 몇 주 만에 제시하였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막스 보른(1882-1970, 195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가모브의 제안을 비판하였다. 엄밀성을 강조하던 보른의 기준에는 가모브의 양자역학적 직관에 의한 설명이 못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보른은 가모브의 제안을 스스로 엄밀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사실 요즈음 사용되는 양자역학 교과서에 예제로 나오는 알파 붕괴 확률 계산은 이 당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형은 가모브에 기인한 것으로 알파 붕괴를 양자역학적 터널 현상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덕분에 가모브는 매우 유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른은 가모브의 수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 가지 여담으로 보른의 외손녀는 보른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다. 바로 가수 겸 영화배우인 올리비아 뉴튼 존(1948-)이다. 유대인인 보른이 나치 독일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국에 와서 정착한 까닭이다.

연수를 마치고 소련으로 돌아가던 가모브는 코펜하겐에 하루 들러 닐스 보어(1885-1962)를 만나게 된다. 이 짧은 만남의 자리에서 가모브의 물리의 중요성을 바로 알아차린 보어는 가모브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서 러더퍼드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보어에게도 보른이 매우 혹독한 잣대를 댄 적이 있기 때문에 가모브를 동정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덕에 가모브는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원자핵의 물방울 모형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이 모형은 수학적 엄밀성은 떨어지나, 원자핵이 갈라지고 융합하는 과정을 마치 물방울이 갈라지고 뭉치는 것과 같이 여기는 모형이다.

가모브의 물리적 직관에 의해 미지의 핵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보어는 이 모형을 특히 좋아했다. 특히 1934년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1912-2007)는 핵의 질량에 대한 공식을 물방울 모형에 기반을 두어 얻었다.

가모브는 알파입자가 원자핵에서 나올 수 있다면,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나 알파입자를 원자핵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같은 부호의 전기를 가지고 있는 핵과 양성자가 밀치는 힘을 극복할 에너지로 양성자를 가속하면 핵 속에 양성자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컨대 터널 현상의 반대 현상도 일어날 확률이 있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가능하면 한 가지 원소를 더 무거운 원소로 바꾸는 연금술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런 아이디어를 좋게 본 러더퍼드가 콕크로프트(1897-1967)와 월턴(1903-1995), 두 실험학자에게 양성자를 100만eV로 가속할 장치 제작을 부탁한다. 1932년 실험에 성공한 이 두 사람은 195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1930년 후반부에 가모브는 핵물리학 교과서를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이 교과서가 나중에는 별로 쓰임이 없게 되는데, 가모브가 너무 앞서 나가 중성자(1932년 채드윅(1891-1974, 193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발견)가 채 발견되기 전에 교과서를 썼기 때문이다.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진 원자핵물리학 교과서는 중성자 발견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1931년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으려 소련으로 돌아간 가모브는 이유 없이 여권 발급이 거부되었다. 그전 1929년에는 가모브의 업적을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 노동자의 아들이 원자핵을 설명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2년 사이에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스탈린 정부가 자본주의 과학과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구분 지으면서 외국으로 다니는 학자들을 의심한 것이다.

소련으로 돌아가 1931년 결혼한 가모브는 크림 반도에서 시작하면 270㎞ 흑해를 가로질러 터키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조그만 보트를 부인과 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틀간 바다를 떠돌다 떠난 곳에서 수 ㎞ 떨어진 곳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가모브를 소련에서 나오게 하고자 한 보어는 1933년 벨기에에서 소수의 물리학자들만 참가하는, 전통 있는 솔베이 학회에 가모브를 초청하였다. 이때 주제가 원자핵의 구조였다. 당시 학회 의장이던 랑제방(1872-1946)이 보증을 서주어 소련에서 출국이 가능해졌다. 랑제방은 지도교수의 미망인인 퀴리(1867-1934)와 각별한 사이였다.

이 학회에서 퀴리 부인을 만난 가모브는 소련 탈출 도움을 청하였고, 그녀의 도움으로 두 달간 파리에 머물게 된다. 그후에 코펜하겐과 케임브리지에서 몇 달씩 더 머문 가모브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 자리를 얻어 1934년 미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1935년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 정착한 그는 매년 조지 워싱턴 대학 이론물리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유럽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토론하는 것을 미국에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첫해의 주제는 핵물리학이었다.

핵물리학 전공의 텔러(1908-2003,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림)를 채용한 가모브는 1938년도에는 당시 새로운 주제인 ‘별의 에너지 근원의 문제’에 대한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핵물리학자와 천체물리학자들을 동시에 초청한다. 이 학회에 마지못해 초청받았던 베테(1906-2005, 196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별 내부에서의 핵융합 반응에 대해 중요한 논문을 곧바로 쓰게 되는 것이 이 시점이다.

이후에 가모브는 새로운 연구 분야인 천체물리학과 우주론에 도전한다.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좋아했던 그의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핵물리학에 대한 가모브의 깊은 이해가 빅뱅 우주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빅뱅 우주와 가모브 프리드만의 우주 모형 이후에 매우 중요한 결과가 벨기에의 가톨릭 신부 겸 물리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1894-1966)에 의해 나왔다. 그는 1927년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제안하였다. 불어로 된 논문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케임브리지에서 그를 지도했던 에딩턴(1882-1944)이 이 논문의 중요성을 알고 영어로 번역해 자신이 그 내용을 소개하는 등의 노력에 힘입어 르메트르가 유명해진다. 그런데 이 논문이 발표될 당시에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허블(1889-1953)이 1929년이 되어서야 은하계들이 우리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허블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세계 최대 망원경인 윌슨 천문대에서 너무 추워 눈썹이 망원경에 들러붙을 정도의 환경에서도 관측을 한 허블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2년 전 이미 르메트르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우주론 계산에서 이런 적색 편이와 거리가 비례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찾아놓았다. 1930년 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르메트르는 1931년 「양자 이론의 관점에서 본 세상의 시작」 이라는 매우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우주 초기에 ‘원시 원자’의 상태로 우주가 시작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빅뱅’ 우주론이라 불리는 이론의 중요한 내용을 제안한 것이다. 그럼 흔히 빅뱅 우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모브가 빅뱅 우주론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알아보자. 사실 가모브는 르메트르보다 15년 후에 우주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모브의 업적이 높게 나타나는 이유를 살펴보면 가모브가 프리드만의 일을 통해 이미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활용한 우주론에 대해 알고 있었고 원자핵물리학에 대한 기여를 통해 우주가 시작한 직후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처음 생각한 사람이다.

즉, 르메트르가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으나 그 이후에 어떻게 우리가 사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들이 만들어졌는가를 설명하지 못한 반면 가모브는 그의 핵물리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그 설명을 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가모브는 이전까지 하던 연구에서 방향을 바꾸어 별 속에서 일어나는 핵반응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별 속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제안을 1920년 에딩턴이 처음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있을 당시는 아직 양자역학이 완성되지 못한 때였다. 한편 베테는 1930년대에 태양 내부에서의 핵융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태양의 수명을 예측하였다. 그리고 1938년 조지 워싱턴 대학의 이론물리 콘퍼런스에 초청받았지만 다른 관심사 때문에 마지못해 참석한 베테는 태양의 중심 온도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낮은 온도인 1500만 도라는 것을 알고는 새로 계산하여 양성자들의 충돌로 시작한 연쇄 과정을 통해 헬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된다.

나아가 더 무거운 별에서는 탄소-질소-산소 사이클을 통해 원소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베테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이다. 천체물리학과 핵물리학에 사람들이 관심이 늘어날 때,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좋아하던 가모브는 1946년 그를 빅뱅 이론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만든 논문을 발표한다. 수식이 3개밖에 없는 4페이지짜리 논문이다.

여기서 그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주 초기에서 얻으려 한다. 즉, 여러 원소들의 원자핵의 합성이 별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고온 고압의 우주 초기의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었다. 고온에서 시작한 우주가 수 초 내에 일어난 급속한 팽창 때문에 온도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프리드만의 팽창하는 우주에서의 핵반응을 생각한 것이다. 사실 현대 우주론에서 보면 이 논문에는 결정적 결함이 있다.

그가 모든 원소의 생성을 초기 우주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가벼운 원소만이 우주 초기에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별의 내부에서 합성이 필요하고 나아가 초신성의 폭발로 아주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훨씬 뒤에 밝혀진 사실들이다. 첫 우주론 논문 후 2년간 가모브는 원소들의 기원에 대해 계속 연구하였다. 당시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은 우주의 구성비가 99% 수소와 헬륨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기율표에 나오는 다른 모든 원소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가가 문제였다.

그는 처음에는 중성자로 가득 찬 우주에서 중성자가 붕괴하면서 양성자와 전자가 만들어지고 연속적인 핵반응으로 더 무거운 핵들이 만들어지는 우주를 상상했다. 1947년경에는 우주에서의 원소들 구성 비율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가모브의 연구 결과는 그의 학생인 앨퍼(1921~2007)와 같이 「원소들의 기원」이라는 1페이지 조금 넘는 논문으로 1948년 만우절인 4월 1일 발표된다.

장난치기를 좋아했던 가모브는 논문에 기여하지 않은 베테를 저자로 넣어서 앨퍼-베테-가모브라고 하여 알파-베타-감마와 흡사하게 만들었다. 가모브는 앨퍼와 함께 1948년 매우 뜨거운 상태의 우주를 상상하였다. 양성자, 전자, 중성자가 뒤섞여 매우 뜨거운 상태로 있다가 우주가 시작되고 수 분 후에는 충분히 식어서 헬륨이 만들어질 정도(그러나 아직도 수십억 도)가 되는 팽창하면서 식는 우주를 상상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원소의 핵들도 계속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우주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계산하려 하였으나, 다른 원소의 구성비를 재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 후에 앨퍼는 허만(1914-1997)과 같이 우주의 온도가 절대온도 5도 정도 되며 이를 반영하는 우주배경복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측하였다. 우주의 온도가 3000도 정도 될 때 우주의 물질은 불투명한 플라스마 상태에서 투명한 가스로 바뀌게 된다. 대략 우주 나이 30만 년쯤 되면 이 시점의 빛이 떠돌다가 우주 팽창에 따라 온도가 내려가며 파장이 1000배 이상 길어져 마이크로파로 현재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논문은 당시 우주론계를 지배하던 정상 상태 우주론에 밀려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즉 가모브와 앨퍼, 그리고 허만의 연구가 우주의 팽창에 의해 원소의 비율과 우주배경복사가 나온다는 중요한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계 전반에서는 우주론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와 함께 비록 관심이 있더라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호일(1915-2001) 등에 의해 강하게 주장되던 정상 상태 우주론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특히 이들이 있는 대학교가 명성이 조금 떨어지는 대학이었다는 사실도 이런 무관심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헬륨의 분포에 대한 논의는 정상 상태 팽창 우주론과 대폭발 이론 사이에서 대폭발 이론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여러 원소들의 비율은 원자핵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있기 전에는 원래 그런 비율로 태초부터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소 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이런 원소의 비율이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에딩턴이 1920년 러더퍼드와 그의 연구진을 만난 자리에서, 케임브리지의 연구실에서 원소의 변환이 가능하다면 태양 속에서도 원소의 변환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러나 양성자와 중성자(이 두 가지를 핵자라 부른다)를 가지고 헬륨 핵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했으나, 핵자가 5개 있는 핵을 넘어서는 이론적 계산이 매우 어려웠다.

이런 핵은 매우 불안정하여, 그 이상의 핵자를 가진 더 무거운 핵을 만들기 위해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륨 다음으로 무거운 안정된 핵은 리튬으로 3개의 양성자와 3개 또는 4개의 중성자를 갖고 있다. 베테가 1939년 논문에서 바로 이 장벽을 제거했다.) 그런데 별의 내부에서 핵 합성이 원활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겨지던 당시에 태초의 ‘원시 원자’에서 원소의 합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운석과 지구에 있는 물질, 그리고 천문학에서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주에는 수소와 헬륨이 99% 정도 있고, 나머지 원소들이 질량이 커질수록 더 적은 비율로 분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앨퍼와 가모브는 이와 같은 추세를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의 연구에 필요한 중성자가 포획되는 율에 대한 데이터가 당시 쌓여 있었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중성자를 가장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물질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앨퍼가 착안한 것은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원소들은 다른 물질로 전환이 쉽게 되어 우주에서의 비율이 적고, 반면 중성자를 잘 흡수하지 않는 원자핵은 그 비율이 높다는 점이었다. 중성자가 잔뜩 들어 있는 뜨거운 초기 우주를 아이름(Ylem)이라 불렀고 그런 가운데 각종 핵반응이 일어났으며 이런 상태가 30분 안에 끝날 동안 대체로 원소의 비율 표와 흡사한 원소 비율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특히 수소 원자핵과 헬륨 원자핵이 10 대 1로 만들어짐을 보였다. 가벼운 원소의 합성이 우주 초기에 일어났고 별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는 중수소의 비율을 꼽을 수 있다. 별 속에서의 반응으로는 중수소의 비율이 이렇게 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 우주에서만 이런 비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빅뱅 우주론 vs. 정상 상태 우주론

2차 대전 당시 같이 레이더를 개발했던 본디(1919-2005)와 골드(1920-2004) 그리고 호일은 우주가 점점 팽창해서 우주 밀도가 점점 낮아지게 되면 물리 법칙들이 시간에 따라 바뀔 것이라 생각하였고 따라서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주의 밀도가 시간에 따라 바뀌지 않는 정상 상태의 우주를 생각했다. 언제 보더라도 우주는 항상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고 팽창하는 우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물질이 연속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계속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팽창하는 우주의 밀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1㎦에서 매시간 1개의 수소 원자가 만들어지면 된다고 계산했다. 이들의 정상 상태 우주론은 빅뱅 우주론과 경쟁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다가 우주배경복사가 발견된 후 거의 소멸하는 이론이 된다. 특히 호일은 BBC 라디오 등에 출연하여 우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론과 상반되는 우주가 뜨거운 상태로 시작했다고 하는 르메트르나 가모브의 이론을 조롱하기 위해서 뻥 터져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빅뱅 우주’라는 말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상 상태 우주론은 우주배경복사의 발견 이후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우주배경복사의 발견 앨퍼와 허만의 우주배경복사 예측은 19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소련의 젤도비치(1914-1987) 와 미국의 디키(1916-1997)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그리고 실험적으로 1964년 펜지아스(1933-) 와 윌슨(1936-)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펜지아스와 윌슨은 1963년부터 전파 망원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벨 연구소에서 만든 펜지아스와 윌슨의 안테나는 1960년부터 에코Ⅰ 위성과의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그런데 1962년에 텔스타라는 위성이 올라가고 나서는 그 통신 장비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래서 펜지아스와 윌슨은 쓸모없게 된 큰 장비를 가지고 우리 은하계에서 오는 전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사실 펜지아스와 윌슨의 우주배경복사 발견 휠씬 전에 이를 우연히 발견하였으나 그 중요성을 완전히 놓친 사례가 있다. 1941년 캐나다 천문학자 맥켈러(1910-1960)는 CN 분자가 2.3도에 해당하는 복사에 의해 에너지를 얻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관측의 오차로 잘못 분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당시에 벨 연구소는 상업적이지 않은 순수 연구도 지원을 하였다.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에서 이렇게 했던 이유는 최고로 우수한 인재들이 자신의 흥미를 위해서 장비를 만들 경우에 간혹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탓이다. 한 사례로 트랜지스터 발명이 벨 연구소에서 나온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런 지원이 회사의 홍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0년대에 AT&T가 여러 개의 회사로 해체되면서 이런 지원이 사라지게 되었다. 수 ㎜에서 30㎝의 파장을 가지는 마이크로파를 측정하도록 되어 있는 전파 망원경이었는데 7.35㎝의 파장 영역을 주로 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이 파장에서는 하늘에서 오는 신호가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계속적으로 신호가 잡혔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서 장비의 문제점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보완했음에도 불구하고 잡음이라 생각한 신호를 없앨 수 없었다.

이렇게 2년 동안 궁리를 하다 보니 이 신호가 진짜 신호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신호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던 사람은 1965년 당시 세계에 10명 정도 밖에 없었다. 앨퍼, 가모브, 허만 3인, 인근 프린스턴 대학교의 4명, 디키(1916-1997), 피블스(1935-), 윌킨슨(1935-2002), 롤(대학 행정직으로 경력 변환), 그리고 1964년 우주배경복사 존재 논문을 쓴 도로시케비치(1935-), 노비코프(1935-), 그리고 젤도비치(1914-1987) 등이 그들이다.

2차 대전 당시 레이더 개발에 참여했던 디키는 마이크로파 안테나를 만드는 전문가였다. 그는 이런 실용적인 능력을 매우 근본적인 질문, 즉 우주의 근원에 활용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하였다면 그 흔적으로 마이크로파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3.5㎝ 파장의 마이크로파 안테나를 제작한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가모브 자신은 대폭발 이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956년 콜로라도 대학으로 옮긴 뒤에는 학문적으로 아주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더구나 가모브는 엄청난 술고래였는데, 종종 이 주벽 때문에 학회에서 눈꼴사나운 상황을 여러 번 연출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런 특이한 행동이 물리학 공동체에서 자신의 위치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그렇게 대폭발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모브는 꾸준히 일반 대중을 위한 저술 활동을 하였고, 그 같은 과학 대중화에 대한 공로로 1956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수여하는 칼링거 상(Kalinga Prize)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또 가모브는 죽기 이틀 전에도 프리만 다이슨(1923-)에게 쓴 편지에서 기본입자의 특성과 우주의 여러 물리량의 연관성을 고민한 흔적을 보이는데 그것만 보아도 시대를 너무 앞서간 학자라 생각한다.

3.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과 이휘소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는 인류 문명이 나온 이후 수천 년간 던져온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지난 50년간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이다.

입자물리학에서의 표준모형은 양성자와 중성자 등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쿼크들, 보다 자유롭게 떠도는 여섯 가지 렙톤들(전자와 뉴트리노 등), 광자를 위시한 여러 가지 게이지 입자들, 그리고 힉스 입자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나아가 이 입자들이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현재까지의 실험과 관측으로 나온 입자물리 현상의 거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간접적인 증거로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암흑 물질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론으로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2012년 힉스 입자가 발견될 때까지 실험적으로 잘 검증된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처럼 한 사람이 완성한 이론이 아니고 여러 명의 노력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특히 표준모형이 완성되는 최종 단계에서 이휘소가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비교적 유복한 의사 부모 아래서 태어난 이휘소는 서울대학교를 채 마치지 않고 미국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 오하이오 주의 마이애미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피츠버그 대학에 입학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옮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그의 능력은 대학원생 때 이미 드러났다. 보다 자세한 이휘소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였던 강주상 저 『이휘소 평전』을 참고하기 바란다.

게이지 이론과 이휘소

역사적으로 맥스웰이 19세기에 전기와 자기를 통합하여 잘 기술한 전자기 이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에 양자역학이 완성되면서 특히 전자와 반입자인 양전자를 잘 설명하는 디랙-방정식이 완성되었다. 전자기 이론에 양자역학을 접목하는 과정, 즉 광자와 전자가 상호작용하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칭성과 연관되는 게이지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대칭성 때문에 필요한 게이지 입자는 질량이 없는 광자이다. 전자와 광자를 같이 설명하는 이론인 가장 간단한 게이지 이론은 ‘양자전기역학’이라 불리는 이론으로서 전자와 양전자가 어떻게 쌍소멸하고 전자가 광자에 어떻게 산란하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계산해낸 것인데 1930년대에 제안되었다.

이때 실제 실험치와 이론에서 계산하면 무한대로 나오는 값들을 비교하기 위해 매우 세련된 계산 방법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재규격화(renormalization)라 부른다. 무한대 값에서 다른 무한대 값을 잘 빼내어 유한한 측정 가능한 값을 계산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업적으로 슈윙거(1918-1994), 도모나가(1906-1979), 파인만(1918-1988)이 1965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으며 그 외에도 베테, 다이슨 등의 업적이 있다.
방사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인 약한 상호작용이 원소의 붕괴에 간여함을 1930년대에 페르미(1901-1954)에 의해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약한 상호작용을 새로운 게이지 입자를 도입해 보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광자가 질량이 없듯이 새로운 대칭성에 연관되는 게이지 입자 역시 질량이 없게 된다.

그러나 매우 짧은 상호작용 거리를 가지고 있는 약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게이지 입자가 질량을 얻어 ‘벡터 보손’의 형태로 되어야 된다고 이해해야 했다.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합하여 같이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1960년대에 글래쇼(1932-)가 제안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와인버그(1933-)와 살람(1926-1996)이 통합된 게이지 이론에서 나오는 4개의 게이지 입자가 그 게이지 대칭성이 깨어짐에 의해 1개만 질량이 없고 (광자) 나머지 3개는 질량이 있는 벡터 보손으로 나온다는 이론을 1960년대 후반에 제안하게 된다. 앞의 3명은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74년 입자물리학계의 최대 학회인 ICHEP(국제 고에너지 물리 콘퍼런스, 2018년은 서울에서 개최)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이휘소는 게이지 이론에 대해 기조 강연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원래 와이버그의 모형이라 불리는 당시의 입자물리 표준모형에 대한 설명을 준비했다.

사실 1967년 와인버그의 2페이지짜리 논문은 표준모형의 방정식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힉스의 자발적 대칭성 깨어짐과 약한 상호작용과 전자기를 통합한 게이지 이론을 조합한 논문이었다. 다만 이 이론이 재규격화되는지를 궁금해하면서 논문을 마친 상태였다. 살람은 논문을 통해서가 아니고 1968년 노벨 심포지엄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방정식을 구체적으로 적지도 않은 발표 자료였다.

이휘소를 런던에서 만난 살람은 이휘소의 강연 전날 최고의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였고 와인버그 모형은 와인버그-살람 모형으로 고쳐졌다. 표준모형에는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 ‘자발적으로 깨어진’ 게이지 이론이 등장한다. 세 가지 벡터 보손 중에 두 가지는 전하를 가지고 있어 W-보손으로 불리고 나머지 하나는 전기적으로 중성인 Z-보손으로 불린다. 실제로 중성인 Z 입자에 의한 약한 상호작용이 1970년대 초반에 실험적으로 발견되고 1980년대 초반에는 W, Z 보손들이 발견된다.

이렇게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어진 게이지 이론이 앞서 언급된 양자전기역학과 마찬가지로 실험치와 비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재규격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이휘소가 연구하고 있는 도중에 이휘소의 강의에 영향을 받은 토프트(1945-)와 그의 지도 교수인 벨트만(1931-)이 매우 난해한 방식으로 재규격화를 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를 다른 학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이 이휘소다. 토프트와 벨트만이 노벨상을 받을 때 이휘소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표준모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쿼크들이 어떻게 양성자를 구성하는지 설명할 이론이 필요했다. 다른 게이지 이론으로서 쿼크 간의 강한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음을 1973년 폴리처(1949-)와 그로스(1951-), 윌첵(1941-)이 이론적으로 보였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양자색역학의 점근적 자유성이라 부르는 성질을 입증한 것이다. 이 3명은 200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멀어질수록 힘의 크기가 작아지는 전자기적 상호작용과는 달리 가까워지면 힘이 약해지고 멀어질수록 힘이 커지는 게이지 이론을 활용하여 쿼크가 양성자 안에 완벽하게 가두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으로 수학에서 3×3 행렬을 나타내는 SU(3) 대칭성이 있는 게이지 이론을 이용한 것이다.

참입자와 이휘소

참입자와 이휘소 이휘소의 업적으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가 가장 많이 논의된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논의 하자면 글도 길어지고 아무리 길게 쓰더라도 일반인에게 충분히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이휘소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인 참(charm) 입자에 관한 것을 보다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표준모형의 중요한 요소인 쿼크의 구성에 대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1960년 초까지 입자가속기에서 만들어지는 강입자들은 수백 종에 이르렀다. 기본 입자들을 연구한다고 시작했는데 수백 가지가 쏟아져 나오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태를 잠재운 제안이 나왔는데 1964년 겔만(1929-)과 츠바이크(1937-)의 쿼크 모형이다.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양성자 그리고 중성자로 대표되는 강입자들이 사실은 기본 입자가 아니고 더 작은 구성 성분인 쿼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모형이다.

즉 양성자는 3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전하는 23인 업-쿼크 2개 그리고 전하가 -13인 다운-쿼크 1개로 되어 있으며 중성자는 업-쿼크 1개와 다운-쿼크 2개로 이루어져 있어 전기적으로 중성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1950년대에 새로 발견되기 시작한 불안정해서 짧은 수명을 갖는 많은 입자들이 이런 쿼크들의 복합체의 들뜬 상태이든지 보다 무거운 또 다른 쿼크인 기묘한 쿼크(strange quark, 전하 : -13)가 들어 있다는 모형이었다.

이 무거운 입자의 질량도 예측되었다. 이 모형은 당시 알려진 입자들을 잘 설명했는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강입자도 예측하였다. 쿼크 모형으로 보면 기묘한 쿼크가 3개 들어 있는 것이다. 당시 입자가속기에서 나온 입자는 거품 상자라 불리는 투명한 액체를 지나가면서 충돌하고 새로 만들어진 입자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검출되고 있었다. 1964년 미국 브룩헤븐 연구소에서 바로 전하 -1을 가지고 예측된 질량을 가진 입자를 발견하였다. 나중에 오메가 강입자라 명명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물리학의 뒷이야기를 하나 할 필요가 있다. 거품 상자를 이해하려면 맥주를 생각하면 된다. 맥주를 잔에 따라 놓고 소금 알갱이를 던져 넣으면 작은 거품으로 이루어진 궤적을 만들면서 소금 알갱이가 지나간다. 바로 이런 현상을 활용한 것이다.

꽤 오랫동안 거품 상자를 발명해서 노벨상까지 받은 글레이저(1926-2013)가 맥주를 마시다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들어 글레이저 스스로 그런 이야기는 잘못되었다고 시정하였다. 다만 초기 거품 상자에 담겼던 액체가 맥주였던 것은 사실이다.

쿼크들로 이루어진 강입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세 가지 쿼크를 3개씩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일까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쿼크 중 일부가 더 들뜬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따져보면 당시의 수많은 강입자들의 스펙트럼을 다 설명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겔만은 1969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럼 왜 츠바이크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굳이 이유를 든다면 논문 발표 당시 겔만은 교수였고 츠바이크는 박사 과정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겔만은 1961년에 SU(3) 대칭성을 이용해 강입자들을 분류할 수 있음을 보였고 이 과정에서 오메가 강입자도 예측했다. 이러한 대칭성에 기반해서 기본입자로서의 쿼크를 생각한 것은 1964년에 겔만과 츠바이크가 각각 독자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사실 SU(3) 대칭성은 겔만과 별개로 이스라엘의 네이만(1925-2006)도 제안했고 대칭성이 완전하려면 꼭 필요한 입자인 오메가도 제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겔만 혼자 노벨상을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노벨상 위원회의 결정이었음이 분명하다.

1969년 당시에는 쿼크의 존재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실제로 1977년에 파인만이 겔만과 츠바이크를 노벨상에 추천하기도 했다. 쿼크는 다른 기본 입자인 전자와는 달리 개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강입자나 중간자-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러면 이런 쿼크의 존재를 단정적으로 보여준 것은 어떤 실험일까?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구조를 보는 데 큰 성공을 얻은 그 실험은 유명한 러더퍼드의 산란 실험이다.

얇은 금박에 헬륨 핵인 알파선을 쬐어주었더니 강하게 뒤로 튀어나오는 알파선이 있음을 본 것이다. 이는 마치 종이 한 장에 총알을 쏘았더니 총알이 뒤로 튀어나오는 현상을 본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금 원자의 질량의 대부분이 아주 작은 곳에 모여 있어서 이런 작고 단단한 것에 부딪힌 알파선이 뒤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원자핵의 발견이다. 원자의 구조가 작은 핵 주위에 거의 빈 공간에 전자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양성자의 내부를 연구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1966년 스탠퍼드대학에 완공된 3.2㎞ 길이의 선형 전자 가속기를 활용할 실험 계획이 잡혔다. 알파선 대신 전자로, 금박 속의 금 원자핵 대신 양성자에 충돌하는 실험이 1968년부터 수행되었다. 1969년 일련의 논문에 발표된 실험 결과는 양성자 속에 매주 작은 알갱이들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자가 충돌한 후 뒤로 여러 입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것이다. 러더포드의 실험이 탄성 충돌이었던 데 비해 이번의 실험은 비탄성 충돌로서, 전자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입자들로 그 에너지가 전환되었으나 양성자 속의 작은 알갱이들의 존재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업적으로 1990년 프리드만(1930-), 켄달(1926-1999), 테일러(1929-) 3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작은 알갱이들의 존재가 쿼크의 실체를 믿을 만하게 했다. 1960년대 후반에 아주 미묘한 실험 결과가 나왔다. 기묘 쿼크가 들어 있는 기묘 입자들은 붕괴하여 보통의 입자-업-쿼크와 다운-쿼크들만 들어 있는-가 된다. 이런 붕괴 중에 전하가 바뀌지 않는 붕괴가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글래쇼, 일리오폴로스(1940-), 마이아니(1941-)의 3명의 이론학자들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네 번째 쿼크의 존재를 가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쿼크가 존재한다면 새로운 강입자들이 있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성질, 예를 들어 질량, 스핀 등을 가진 입자를 찾으려 해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된다.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게 실험적으로 입자를 찾아야 하는데 무턱대고 입자의 존재를 검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를 찾아야 참-입자를 찾을 수 있는지 계산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휘소이다.

1974년에 이휘소는 메리 가이아(1939-)와 함께 참-입자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참-쿼크의 질량을 예측했다. 참-쿼크를 발견하려면 어디에서 찾을까 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한데 바로 이 단초를 최초로 제공한 논문인 것이다. K0-K0bar의 질량의 차는 참-쿼크의 질량의 함수로서 표시할 수 있었는데 알려졌던 질량 차의 실험치로 약 1.5GeV 정도에 참-쿼크 질량에너지가 예측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는 참-쿼크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휘소, 가이아, 로스너(1941-) 3명이 보다 심층 분석한 「참-입자 탐색」 논문을 기고하였다. 1974년 여름이었다. 이 두 논문은 브룩헤븐에서 실험하고 있던 새뮤얼 팅(1936-, 197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게 어디를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할 힌트를 주었고, 실제로 1974년 8월 말에 e+ e- 에너지 3.1GeV에서 입자를 보았다.

이 입자는 두 실험 그룹에서 동시에 11월 공식 발표된다. 미국 서부의 스탠퍼드의 리히터(1931-, 197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전자와 양전자 충돌을 통한 쌍소멸을 실험하고 있었고, 동부의 브룩헤븐 연구소의 팅은 양성자와 베릴륨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쌍생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리히터는 마크 Ⅰ(MARK Ⅰ)이라 불리는 입자검출기를 활용하였다. 팅은 미시간 대학교에서 학부와 박사 과정을 6년에 다 마쳤다. 이 동안 수업은 여러 번 빼먹었으나 미시간 대학의 유명한 축구팀 경기에는 단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동시에 두 연구팀은 양성자 질량의 3배가 조금 넘고 수명도 비교적 긴 입자의 존재를 밝혔다. 전혀 다른 실험에서 동시에 이렇게 입자를 발견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발견은 러시아 혁명에 빗대어 입자물리학의 11월 혁명이라 불린다. 팅은 1972년부터 브룩헤븐 연구소에서 실험을 시작했는데, 사실 이 실험을 위해서 여러 군데 더 큰 실험 연구소에 제안을 했다. 미국의 페르미 연구소, 유럽의 CERN 등.

그러나 그의 연구 제안은 다 거절되었다. 이유인 즉 당시 모든 입자물리 현상을 3개의 쿼크로 충분히 잘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새로운 네 번째 쿼크를 발견하려 하는 것은 쓸데없다는 것이었고 실험적으로도 100억 개 중에 1개의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려는 것은 실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보스턴에 1초에 100개의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그중에 하나만 유달리 푸른 색을 가지고 있다 할 때 그것을 발견하는 정도로 어려운 것이라고 팅은 설명한다.

브룩헤븐 연구소에서는 ‘실수’로 이 실험을 허락했다고 팅은 이야기 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2년의 실험으로 새로운 네 번째 쿼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쿼크와 반-쿼크의 결합이 되어 있는 이 입자는 인접한 다른 에너지를 가진 다른 불안정한 입자보다 1만 배 정도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 다시 팅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이는 평균수명 100세 정도 사는 인간 사회에 100만 년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발견된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이렇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된 개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번 새로운 쿼크가 발견되면 새 쿼크가 들어 있는 수많은 새로운 강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곧바로 이런 입자들이 발견되었다. 나아가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새로운 쿼크의 존재도 추구하게 된다.

실제로 1977년 세 번째 렙톤 가족인 타우 렙톤이 발견됨으로써 다섯, 여섯 번째 쿼크의 존재를 사람들이 매우 강하게 믿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b-쿼크가 1977년 발견되었고 t-쿼크는 1995년 발견되었다. 이휘소의 사망 이후에도 입자물리 표준모형이 하나하나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1977년 타우-렙톤과 입실론 중간자가 발견되었다.

사실 타우-렙톤은 매우 오랫동안 준비되고 수행된 실험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스탠퍼드의 마크 Ⅰ 검출기가 입자물리 표준모형에서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입자를 발견하는 데 활용된 것이다. 이 업적으로 펄(1927-)은 199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제자였던 팅보다 19년이나 뒤늦게.

우주와 입자의 만남

가모브의 우주와 이휘소의 입자물리학은 별개의 것처럼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휘소의 마지막 논문은 우주와 입자가 만나는 입자천체물리학의 효시가 되는 논문이다. 이에 대한 소개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이휘소 박사가 서거한 지 1개월 조금 지난 후 출판된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치」라는 논문은 와인버그와의 유일한 공동 논문이었다. 이휘소 박사의 세 번째 ‘불후의 명작’이다. 표준모형에 나오는 여러 약작용하는 입자들 중에서 그 질량값을 이론적으로 조정해볼 수 있는 유일한 입자가 중성미자다. 그런데 중성미자의 질량값이 너무 크게 되면 뉴트리노만으로도 우주의 임계 질량을 넘어버리게 되어 중성미자 질량의 최대치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이휘소와 와인버그는 새로운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새로운 무거운 중성미자의 질량의 한계를 계산하였다. 이 결과는 최근까지도 많이 연구되고 있는 암흑 물질 중 이런 새로운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것들에도 활용되고 있다.

사실 1980년대 초반부터 입자천체물리와 인플레이션에 기반을 둔 초기 우주론이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 모든 연구의 기초가 바로 이 논문이다. 또한 초대칭성 입자 등의 성질 연구에도 많이 쓰이는 업적이기도 하다. 와인버그는 1977년 『최초의 3분』이라는 일반인을 위한 우주론 서적을 출간함으로써 많은 과학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바 있다.

이휘소는 한국 물리학을 위해 1970년대 중반 이후 많은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는 한국인을 만나도 영어로만 대화하는 등 철저히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살았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에게도 최고의 존경을 받던 학자로서, 2017년 필자가 팅 교수와 잠깐 만나 이휘소를 이야기했을 때도 자신의 물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언급하였다.

4.맺으며

가모브와 같은 창의적 물리학자들의 상상력과 집요하게 근본적인 질문들,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원소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들을 추구하던 물리학자들에 의해 빅뱅 우주론은 시작하였다. 이제는 우주배경복사의 미세한 온도 차(10만 분의 1)를 재고 이를 통해 더 초기의 우주의 상태를 연구하는 집단 연구가 많아졌다.

부정확하던 우주론 연구가 정밀 과학, 빅-테이터 과학이 된 것이다. 우주 시작 당시를 지배할 새로운 물리 법칙, 예를 들어 끈 이론 등을 찾으며 이를 통한 새로운 우주를 상상하고 있다. 다중 우주, 고차원 우주, 빅뱅 이전의 우주 등 인간 사고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우주의 구성원인 암흑 에너지의 정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전파 망원경을 넘어서 중성미자 망원경, 그리고 이제는 중력파 관측소를 통한 우주의 관측 가능 경계가 훨씬 넓어졌다.

이휘소가 지대하게 기여한 입자물리 표준모형은 2012년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완결지어졌지만 이론적으로는 아직도 불완전한 이론이다. 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1980년대 이후에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초대칭성, 암흑 물질 등 표준모형을 뛰어넘은 이론과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실험적 증거에 대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형 실험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국제 공동 연구 등을 통해 보다 활발해졌다. 그리고 먼 우주에서 오는 초고에너지 우주선을 통해 이제는 입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이 융합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이 모든 인류의 고귀한 노력 가운데 과거에 세계 최고 수준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다시금 세계 최고의 발견과 이론의 선구자가 다시금 나오기를 조심스레 기대하며……. / 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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