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 "뉴턴, 과학 패러다임을 바꾼 근대 과학혁명의 종합이자 완결"- 정병훈 교수 강연 '뉴턴, 근대 과학의 정초' 요약
[네이버 열린연단] "뉴턴, 과학 패러다임을 바꾼 근대 과학혁명의 종합이자 완결"- 정병훈 교수 강연 '뉴턴, 근대 과학의 정초' 요약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6.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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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문화의 안과 밖’의 6월 24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2섹션 과학/과학철학의 세 번째 강연으로 정병훈 경상대 철학과 교수의 '뉴턴, 근대 과학의 정초'를 주제로 진행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정병훈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철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했다.

한국과학철학회 회장, 경상대 교무처장, 교학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경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공저서로는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비판적 사고』, 『철학으로 과학하라』, 『과학 종교 윤리의 대화』, 『인문학과 생태학』 등이 있고 그밖에 존 로크의 『인간지성론』,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킬링 타임』, 존 로지의 『과학철학의 역사』 등을 공역했다.

정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17세기 과학혁명은 뉴턴의 종합에 의해 완결됐다"며 "우선, 긴밀한 연관성을 알 수 없었던 주제들이 단일한 과학적 구조 속으로 통합시키며 이는 보편중력이라는 힘의 결과임을 증명했고, 둘째로는 뉴턴의 물리학은 여러 과학자들의 개념, 법칙, 원리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물리학의 체계를 산출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내용 요약.

정병훈 교수

# 근대 과학의 성립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을 토대로 하며, 그 정점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특히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토머스 쿤(T. Kuhn)이 말하는 의미의 패러다임(paradigm)에 걸맞는 것을 성취하였다는 데, 과학사가들과 과학철학자들은 동의한다.

뉴턴 연구자로 유명한 웨스트폴(R. Westfall)은 “최근의 쿤의 용어로 말한다면, 『프린키피아』는 근대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 모방하고자 했던 패러다임을 확립했다”고 말했다.

또한 과학철학자 맥멀린(E. McMullin)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이후의 과학 및 과학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뉴턴 역학은 모든 자연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패러다임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 이 글에서 나는 뉴턴의 자연철학이 근대 과학혁명의 정점에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뉴턴의 업적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고 하는 이 강연 시리즈 전체의 목적에 이바지하였으면 한다.

#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전후하여 서양 과학에서 도대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것이 왜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인지, 나아가 『프린키피아』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이 강연의 과제이다.

뉴턴은 1687년 6월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이 책의 원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이다. 전체 과학사에서 이 책만큼 그 중요성이 즉각적으로 인정된 적은 거의 없었다.

아이작 뉴턴.

이 책이 간행되는 데 기여했던 에드먼드 핼리(E. Halley)는 영국왕립학회가 발행하는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실린 이 책에 대한 논평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랫동안의 설득 끝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아무도 견줄 수 없는 저자는 이 논고에서 인간 정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보여주는 가장 진기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그는 자연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단숨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논증은 더 이상의 논의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그를 잇는 사람들이 할 일을 남겨놓지 않았다.”

핼리는 이 책의 내용을 집약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평을 마무리한다. “수많은, 그리고 너무나 가치 있는 철학적 진리가 여기서 발견되었고, 한 사람의 역량과 근면함에 의해서 과거의 논쟁이 종료되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뉴턴이 이룩한 업적이 어느 정도길래 이런 찬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뉴턴 당시의 과학은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뉴턴의 업적은 우리들의 세계 이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가 시도한 많은 연구 분야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내재하는 것인가? 뉴턴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존경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뉴턴은 특히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날 뉴턴 연구가들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이다.

# 학자들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이 ‘뉴턴의 종합’(Newtonian synthesis)에 의해서 완결되었다고 평가한다. 코헨(I. Bernard Cohen)이 지적하듯이 ‘뉴턴의 종합’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었고 긴밀한 연관성을 알 수 없었던 주제들이 단일한 과학적 구조 속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뉴턴은 지상에서의 물체 낙하운동, 조수 현상, 달의 운동, 행성과 위성들의 궤도운동을 단 하나의 물리 시스템으로 통합하였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보편중력이라는 힘의 결과임을 증명하였다.

‘뉴턴의 종합’의 두 번째 의미는 뉴턴의 물리학이 갈릴레오와 케플러뿐 아니라 데카르트까지도 포함하여 여러 과학자들의 개념, 법칙, 원리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물리학의 체계를 산출했다는 것이다.

‘뉴턴의 종합’의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수학적 사고와 입자적 사고의 종합이다. 뉴턴은 보일(R. Boyle)과 마찬가지로 자연이라는 책이 입자적 특징과 단어들로 쓰여진 것이라고 보는 동시에, 갈릴레오와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처럼 그것을 한데 묶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수학적인 구문이라고 여겼다.

뉴턴이 보기에 물질의 입자적 구조는 수학적 역학을 자연에 적용하는 확고한 기반이었다. 뉴턴에 의한 수학과 실험의 종합이 근대적 자연관의 완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뉴턴은 단지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혁명의 주역이었다. 그것은 광학, 수학, 그리고 물리학 분야에서의 혁명이다.

# 우리는 그 뉴턴 혁명의 주요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뉴턴은 빛과 색깔에 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태양광의 비균질성을 증명하였고, 색깔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정식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백색광은 실제로는 굴절률이 다른 여러 색깔의 광선들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뉴턴은 그의 유명한 실험에서 프리즘을 통과한 태양광선의 스펙트럼을 암실의 멀리 있는 벽면에 투사하였다. 그는 태양광이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광선들의 집합으로서, 그 각각의 색은 프리즘에 의해 고유한 각도로 굴절한다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뉴턴은 특정 분광대의 빛을 두 번째 프리즘에 통과시킴으로써 자신의 색깔 이론의 귀결을 확증하였다.뉴턴이 발명한 반사망원경은 대물렌즈 대신 거울을 이용하여 상을 형성함으로써 색변이를 제거할 수 있었고, 이 기술은 오늘날에도 모든 망원경에 사용되고 있다.

둘째,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당시 변분법(fluxional method, 變分法)으로 불린 이것은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비상한 힘을 발휘하는 수학적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수학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전 기하학을 사용함으로써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자들도 그의 책을 수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셋째, 뉴턴은 수학적 원리에 입각한 합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확립하였다. 이것은 뉴턴 혁명의 중핵을 이룬다. 뉴턴의 역학 체계는 무한한 극한 과정과 순간적인 변화를 다루는 미적분 수학과, 새로운 힘과 질량 개념을 토대로 한 세 가지 운동의 법칙, 그리고 보편 자연법칙으로서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구성된다.

뉴턴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과학 문제를 풀기 위해서 끌어들였다. 그 문제란 지구 및 천체 현상 모두에 대해 통일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단일한 수학적 물리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과나무.

뉴턴은 보편중력의 원리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중력에 관한 양적인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법칙을 사용하여 '뉴턴적 세계 체계'(Newtonian system of the world)를 정교히 하였고, 그럼으로써 천상과 지상의 현상을 단일한 수학 체계로 설명하였다.

실제로 뉴턴은 그의 달 실험을 통하여 달 궤도의 구심적 가속도로부터 계산된 달에 대한 역제곱의 힘이 지구 표면에서의 호이헌스 진자 실험으로부터 계산된 지상의 중력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뉴턴은 이러한 측정된 값의 일치로부터 달에 대한 구심력이 지상에서의 중력과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를 기초로 뉴턴은 우주 안의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들에 대해서 역제곱의 법칙에 따르는 인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합리역학의 체계화와 정교화, 그리고 중력을 토대로 한 천체역학에 기초하여 세계의 체계를 구성한 것이 뉴턴 혁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이를 통하여 그는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하였다.

#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당시 용어로 ‘자연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자연철학자에 가까웠다. 칼리지 2년차에 뉴턴은 자신의 독서의 열매를 기록하는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노트 앞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채워넣었지만, 맨 안쪽은 '몇 가지 철학적 의문들'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시작했다. 그 제목 위에다 “플라톤은 내 친구이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내 친구이지만, 진리가 더 훌륭한 내 친구다”라고 썼다.

뉴턴은 그의 독서에서 얻은 재료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45개의 주제들을 설정하였다. 그가 선택한 주제들은 새로운 자연철학의 토대를 제시했다. 양, 위치, 시간 연장, 기간과 영원성, 물질, 운동, 빛, 우주의 구조, 무거움, 유동성, 안정성, 축축함, 건조함, 열과 냉기, 자석의 인력, 색깔, 소리, 생성과 부패, 기억, 바다의 밀물과 썰물 등의 주제들이 여기 포함되었다.

# 1664년 케임브리지 역사상 최초의 수학 교수로 아이작 배로우(Isaac Barrow)가 임용되었다. 뉴턴은 그의 강의에 출석하였고, 장학생 선발 시험의 일부였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시험을 배로우의 주관으로 치르게 된다. 배로우는 뉴턴의 천재성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뉴턴에게 수학을 공부하도록 격려하였고, 광학에 대한 관심도 갖게 하였다. 뉴턴은 독학으로 수학을 마스터하였고,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비롯한 당대의 수학을 섭렵하여, 머지않아 대학 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자로 성장한다.그가 이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은 1665년에서 1666년 사이의 불과 2년 동안의 일이다.

1665년 뉴턴이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영국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였다. 그 해 7월부터 세 달 동안에만 런던 인구의 10분의 1이 이 질병으로 죽었다. 대학은 문을 닫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냈다.

뉴턴도 울즈롭에 있는 그의 생가로 돌아갔고 여기서 1667년 대학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머물렀다. 약 18개월의 고립된 생활 가운데서 뉴턴은 장차 세상에 내보일 그의 업적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사가들은 이 시기를 ‘경이의 2년’이라고 부른다. 뉴턴은 만년에 쓴 소고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일은 1665년과 1666년의 대유행병이 휩쓴 2년 동안에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나는 발명을 위한 절정의 나이에 있었고, 그 후의 어느 때보다 수학과 철학에 마음을 집중시켰다.”

그가 역학과 광학, 그리고 수학에서 이룬 업적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미 착상되고, 상당히 성취되었다고 많은 뉴턴 연구자들은 믿고 있다.

1667년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뉴턴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초급 연구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에는 상급 연구원이 된다. 그것은 스승인 배로우가 그를 신임한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1669년 배로우는 수학과 광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26세의 뉴턴에게 그의 자리를 양도하고 은퇴한다.1672년 29세의 나이로 왕립학회 회원에 선출되었다.

# 우리는 17세기의 자연철학에는 두 가지의 혁명적인 발전이 존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주의 자연철학으로부터 데카르트의 기계론으로의 발전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데카르트의 기계론으로부터 뉴턴의 실험철학으로의 발전이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뉴턴의 실험철학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나는 뉴턴의 과학 방법론의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로 집약하고자 한다. 첫째, 뉴턴의 실험적 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가설의 방법에 대한 반박에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의 입장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을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도출하려고 하였다. 뉴턴이 보기에 자연에 대한 이 이론화의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이론화의 대표적인 것이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가설이다. 뉴턴은 실험과 관찰에 입각하지 않은 명제를 ‘가설’이라고 지칭하면서, “나는 가설을 꾸미지 않는다”(I feign no hypothesis)고 선언하였다.

둘째, 뉴턴은 가설의 방법의 대안으로 “분석과 종합의 방법”을 제시한다. 여기서 분석이란 결과로부터 그것의 원인으로, 개별적인 원인으로부터 일반적인 원인으로 진행하여 가장 일반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는 논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이란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귀납적인 일반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종합이란 발견된 원인을 가정하고 그것을 원리로 확립하여, 그것으로부터 진행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 뉴턴은 실험과 관찰로부터 귀납에 의해 논증하는 것은 일반적 결론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뉴턴에게 실험적 방법의 도입은 기계론자들이 추구했던 자연 현상에 대한 증명적 지식의 이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 뉴턴은 유명한 '양동이 실험'을 통해서 참되고, 절대적인 운동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뉴턴은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제안한다.

'법칙 Ⅰ. 모든 물체는 가해진 힘에 의해서 그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그 정지 상태 혹은 직선상의 균일한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법칙 Ⅱ. 운동의 변화는 가해진 힘에 비례하며, 그 힘이 가해지는 직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법칙 Ⅲ. 모든 작용은 같은 크기의 반작용을 갖는다. 두 물체에서 서로 미치는 상호 작용은 방향에서 항상 반대이고, 크기는 같다.'

#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기존의 패러다임의 붕괴를 가져오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또 이미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를 확고히 하여, 패러다임의 교체를 의미하는 과학혁명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책은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러면 뉴턴의 실험철학이 패러다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나는 뉴턴의 실험철학이 패러다임의 중요한 요소들을 적어도 몇 가지 확보하고 있음을 지적하겠다.

첫째, 뉴턴의 실험철학은 패러다임에서 중핵적인 부분인 이론과 법칙을 갖고 있다. 뉴턴의 실험철학은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미적분으로 구성된 수학, 힘과 질량 개념을 토대로 한 세 가지 운동 법칙, 그리고 보편 자연법칙인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뉴턴의 이론을 구성하는 수학과 역학, 그리고 중력 물리학이 동일한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뉴턴이 종합한 요소들은 실제로 아주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 미적분과 같은 수학이 없었더라면 운동의 법칙은 경험 현상을 기술하기는커녕 정식화되거나 표현될 수도 없었다.”

둘째, 뉴턴의 실험철학은 분석과 종합이라는 강력한 귀납적 방법을 가지고 있다. 17세기가 진행되면서 케플러, 보일, 호이헌스, 데카르트 등 새로운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지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반성하는 사람들은 자연 현상의 탐구에서 가설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가고 있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역학이 가설에 호소하지 않고도 진행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방법론적 경향을 일소하였다.셋째, 뉴턴의 실험철학은 당시의 기계철학에 대한 강력한 대안을 제공하였다.
“뉴턴은 다른 기계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운동하는 물질적 입자의 체계라고 보았다.” 뉴턴은 그것과는 다른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힘을 추가함으로써, 입자와 입자로 구성된 물체가 다른 입자와 물체에 대해서 떨어진 거리에서도 작용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넷째, 뉴턴의 실험철학은 이러한 경험과학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개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힘’, ‘인력’, ‘중력’, ‘운동’, ‘시간’, ‘공간’ 등으로 구성된 개념적인 틀을 기반으로 역학의 체계와 물리학적 법칙이 성립한다.

다섯째, 뉴턴은 추리 규칙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추구해야 할 ‘원인’ 개념을 규정하고, 자연과학이 추구해야 할 설명의 방식, 그리고 지식의 개념을 제시한다.

뉴턴이 추구한 원인은 ‘진실되고 충분한 원인’으로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과 다를 뿐 아니라, 기계론자들이 추구한 작용인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형상인에 가깝다. 자연과학이 추구해야 할 설명은 이제 목적론적 설명일 수 없다. 그것은 또한 가설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귀추적인 설명도 아니다. 뉴턴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연역-법칙적 설명모델(D-N 모델)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뉴턴 실험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과학적 탐구를 구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철학적 탐구마저도 뉴턴의 실험철학을 모방하고자 하는 경향을 낳았다.

# 뉴턴의 자연철학은 데카르트의 기계철학과의 오랜 대립과 갈등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유럽에서 보편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대결을 통해서 데카르트와 뉴턴은 각각 다른 입장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뉴턴은 진보적이고 성공적인 근대 과학의 이상의 상징으로 떠올랐는데, 이때의 근대 과학이란 엄격하게 실험적인 성격의 것으로서 경험적이고 관찰적인 데이터에 대한 엄밀한 수학적 표현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데카르트는 경험, 정확성, 측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물질의 구조와 행동에 대한 증명할 수 없는 가설로 대치하는 형이상학에 과학을 종속시키는 진부한 시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간단히 말하면 뉴턴은 진리를 표상하는 데 비해, 데카르트는 주관적 오류를 표상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 뉴턴의 궁극적 승리는 기하학에 기초한 데카르트의 정교한 연역 체계에 대한 뉴턴의 실험적 방법의 우월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서의 실험적 방법에 대한 압도적인 인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철학적 탐구의 모델을 수학으로부터 뉴턴적인 역학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를 가져왔다.

뉴턴 자신이 그러한 작업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만일 자연철학이 그 모든 부분에서 이 방법을 추구함으로써 훨씬 완벽해질 수 있다면, 같은 식으로 정신 철학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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