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시 낭송회] 정호승 안도현 박성우 신미나… 시 하나에 사랑이 시 하나에 위로가 시 하나에 꿈이…
[서울국제도서전 시 낭송회] 정호승 안도현 박성우 신미나… 시 하나에 사랑이 시 하나에 위로가 시 하나에 꿈이…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6.2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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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울국제도서전이 피크로 향한 6월 17일의 코엑스 홀은 시가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웃음꽃이 피었다.

이 시대 내로라하는 시인 네명이 한자리에 나란히 앉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는 시를 낭송했다. 객석은 만원. 100명은 훌쩍 넘었고 일부는 맨바닥에 앉아 시인의 얼굴을 보며 그의 시를 들었다.

청중들로서는 낯선 경험이며 즐거운 90분이었다. 시인들은 종이로 만나던 팬들에게 자신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팬들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시요일’이라는 3만3000여 시를 담은 앱을 만들어 배포하는 창비가 자리를 만들었다. 함께한 시인은 정호승, 안도현, 박성우, 신미나 시인이었고 사회는 신용목 시인이 맡아 입담을 과시했다. 먼저 돌아가며 인사말을 했다.

정호승 시인은“이렇게 많이 와 계실 줄 몰랐다. 시를 사랑하는 여러분을 만난 이 기분으로 한해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 먹던 추억을 떠올려봐라. 그런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감성이 넘치는 말을 먼저 던졌다.

이어 안도현 시인 차례. 안 시인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저항의 의미로 (본인 표현) 4년간 절필했었다. 얼마전 4년만에 시집을 냈다. (안도현의 신작은 최근 발간된 월간 ‘시인동네’ 5월호(통권 49호)에 게재됐다. ‘그릇’과 ‘뒤척인다’라는 제목이 붙은 시 두 편이다.) “(시를 다시 쓰니) 이렇게 행사장에도 불러준다. 여러분 뵐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박성우 시인은 “낯선 공간에서 만나 뵙게 돼 반갑다”고 했고 신미나 시인은 “만화로 시를 소개하는 책을 한권 냈다. 창비에서 나온 『시누이』다. 시를 쓸때는 신미나로, 그림을 그릴 때는 ‘싱고’로 활동했다”며 깨알같은 책 홍보도 잊지 않았다.

이날 시 낭송회는 시 낭송 자체도 중요한 독자와의 만남이지만 그 못지않게 시인과 독자의 열린 만남이라는 의미도 강했다. 그래서 시인은 근황을 소개하고 시 쓰는 마음을 기꺼이 털어놓아야 했다. 독자에 한 발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결코 흔치 않은 기회다.

사회자가 정호승 시인을 지목하며 행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정호승 시인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첨성대」로 등단했다.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한결같이, 시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비결이 궁금하다”

정 시인은 “사람마다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나는 시 쓰는 일이 가장 가치 있다. 시를 쓰는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시 쓰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쓸 수 있도록 해준 절대자가 있다면 감사를 전하고 싶다. 나라는 사람을 가치 있게 해 줬다. 아직 쓰지 못한, 가슴 속 시들을 쓰게 해달라는 작은 욕심을 갖고 있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정 시인은 말을 잘하는 편이다. 이어 최근 펴낸 시집 얘기도 했다. “올 2월 창비에서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라는 내 12번째 시집을 냈다. 원래 제목을 결정할 때 ‘거절한다’라는 표현이 말뜻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역설, 반어법이라는 것 알지 않겠나 싶었다. 희망을 간절히 소망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희망이 절망에서 만들어지는 것, 그동안 몰랐다. 절망의 가치를 폄하해 왔다. 희망의 가치만 소중히 여겼다. 희망은 절망의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꽃이다” 이어 정 시인은 「슬픔으로 가는 길」을  낭송했다.

정 시인은 이 시에 대해 “20대 후반에 쓴 시다. 지금 읽어보니 새삼 괜찮다.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다.(웃음). 인간의 삶은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비극성에서 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나는 20대에서 60대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이 대목을 보면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을 만난 것 같다”

정  시인은 또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를 낭송했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이날 행사의 또 하나의 미덕은 청중 가운데 팬을 한명 불러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낭독하게 한 것. 연단에 선 정호승 팬은 “10년간 글로만 접하다 직접 뵈니 감회가 새롭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시다. ‘별들을 울지 않는다’라는 시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준다”라고 했고 이에 정 시인은 “현재 내 삶에 충실하자는 뜻에서 이 시를 쓰게 됐다. 천사도 손을 놓칠 때가 있다”고 답했다.

바통은 안도현 시인에게 넘어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사회자 인사에 “잘 지냈다. 정부도 바뀌어서 그런지 술 맛도 좋은 것 같다. 박근혜 정부 때 시를 쓰지 않는 것으로 대들어보려 했다. 나름 저항의 방식이었다. 재충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게을렀다. 메모도 안 했다”이어 안 시인은 「건진국수」를 낭송했다.

건진국수
                               안도현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반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이 시를 듣고 신미나 시인은  “엄마가 국수 삶아서 소쿠리에 담아주던 감각들이 생각난다. 풍경들도 떠오르고 저녁에 국수 먹고 싶다”고 말했다.

서로 상대방 시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게 좋아 보였다. 한꺼번에 네 명의 시인이 모이다 보니 이런 덕담도 들을 수 있었다.

사회자가 “시인들의 세포에는 소재들이 숨어있는 것 같다”고 하자 안 시인은 “나는 별로 가진 게 없다. 경험도 많지 않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 속에 있는 작은 경험들이 뻥튀기 돼 표현되는 게 시 같다. 그 작은 경험을 끄집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시 「강」 낭송. 안 시인의 팬은 30년 전에 만난 안 시인의 시 「제비꽃에 대하여」가 좋다며 낭송했다.

박성우 시인을 사회자가 소개했다. 71년생. 구절초를 기르고 있다고 했다. 박 시인의 「창문 엽서」는 그가 자두나무 정류장이 있는 마을에 작업실을 얻어 1년 남짓 창비 문학 블로그에 연재한 글과 사진을 모은 책인데, 블루베리 먹감 콩대 아궁이 금낭화 구절초 옥수수대 대설 아침과 시간을 함께하며 순박하게 사는 삶을 그렸다. 청소년 시집도 냈다. 박 시인은 짧은 시 「삼학년」, 「설을 쇠다」, 「꼭 그런다」 낭송.

삼학년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정호승 시인이 한마디 한다. “박성우 시인의 가슴 속에는 소년이 사는 것 같다. 그 소년이 시를 쓴다. 내 가슴 속 소년은 죽은 것 같다. 박성우 시인의 가슴 속 소년이 앞으로 쭉 좋은 청소년 시를 써 줬으면 좋겠다”

시를 그림으로 그려 화제가 되고 있는 신미나 시인 차례다. 신 시인은 “시를 그림으로 그리는 게 재미있었다. 2015년 시를 그림으로, 웹툰으로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작은 궁리에서 시작했다. 시에 어울리는 웹툰을 그리기 시작한 게 어느새 ‘시누이’ 책까지 나왔다”고 했다. 사회자가 기분좋게 맞장구를 쳤다. “시를 보기만 해서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을 보여주는 시 안내서 같다”고.

신미나 시인의 웹툰시집 '詩누이'

이어 신 시인은 「오이지」, 「아무데도 가지 않는 기차」 낭송.

신 시인은  “시 「오이지」는 전 남자친구와 관련된 시다. 그 친구는 오이지를 참 잘 짰다. 여름이면 밥과 오이지를 물에 말아서 후루룩 먹었다. 여름에 오이를 보면 생각나더라”고 했다.

오이지를 직접 짜 본 사람 손 들라는 사회자 요청에 손을 들어 당첨된 20살 청년 팬이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 팬은 “오이지 짜 봤다.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오이지 짜 달라고 했다. 체에다 거르고 누르듯이 짰다. 다시 해보고 싶은 느낌은 아니다”고 했고 신 시인은 “오이지 짜는 남자는 착한 남자다 (좌중 웃음).”라고 덕담을 건네며 “후각이나 미각이 남겨주는 기억을 시로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마무리 순서가 됐다. 박성우 시인은 “다음 시집은 두어달 뒤에 나올 것 같다”고 말했고 안 시인은 “모처럼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으며 정 시인은 “시와 함께 소중한 시간 보내줘서 고맙다. 시를 종이 시집으로만 보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인터넷에 옮길 때 원문만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시 자체의 생명력이 파괴되지 않도록”이라는 당부를 해 눈길을 끌었다.   / 엄정권·이정윤 기자, 사진=이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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